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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남북기본합의 30주년에 부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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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지난 세기말 세계는 탈냉전, 소련 해체, 독일 통일, 사회주의 붕괴가 한꺼번에 몰아치던 격랑의 한가운데 놓여있었다. 한반도 역시 변화의 물결이 몰아쳤다. 대한민국은 유혈없는 타협을 통한 민주적 이행의 결과 안정적 민주주의를 안착시켜 나갔고, 남북관계는 국력의 거의 모든 면에서 남한 우위로 고착되었다. 민주화 이행 전후로 지속된 높은 경제발전 역시 한국의 특장이었다.

일단 한번 땀이 나고 힘이 모이며, 뜻이 맞고 흥이 터지면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한국인들의 혼과 심성, 능력과 잠재력은 이후 서울올림픽·벤처산업·IT·한일월드컵·첨단기술·문화·예술·오락·스포츠의 영역에서 우리와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종종 G7, G9, 또는 D10과 같은, 우리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던 기적적인 세계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통일 방안과 남북기본합의
여야 타협과 전문성 결합의 산물
진영 적대와 독점·독임·폐쇄로는
정책 안정성과 지속성 불가능

실제로 한국의 어떤 첨단기술과 제품들, 어떤 문화예술 작품들은 오늘날 전세계를 덮고 있다. 일찍이 한 예리하고 저명한 세계 관찰자가, (한반도의 산악지형을 유비하며), 20세기 중반 한국이 가장 낮고 어렵던 시기에, “한국을 평평하게 펼쳐 놓아보라. 그러면 (그들은) 지구를 덮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한국의 자연이 아닌 한국인들의 능력의 측면에서, 거의 들어맞지 않았나 싶다.

민주화 이후 발휘된 놀랄 만한 내부 변화 역량 못지않게 세기말 한반도 문제의 변화 폭 역시 엄청났다. 세계적 탈냉전과 국내 민주화와 남북 국력 격차라는 3중 요인이 한꺼번에 만난 효과였다. 7·7선언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발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의 합의, 한·소 수교와 한·중 수교 등 한 정부 임기 내의 업적이라고 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많은 성취가 있었다.

특히 정당과 정당, 보수와 진보, 당국과 민간 사이에 가장 첨예하게 대립해온-남남갈등의 근원이자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대북정책과 통일방안을 민주화 과정에서 여야가 하나로 묶어낸 것은 정치적 경이에 가까운 타협이었다. 역사적 지평에서 볼 때 7·7선언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은,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던 내부협약으로서 6월 항쟁과 6·29선언을, 남북관계와 통일문제와 비핵평화 영역에 적용하여 성공한, 한반도 문제에서의 제2의 협약이자 2중 타협(내부타협이자 남북타협)을 의미했다.

여야 소통과 합의의 결과였기에 당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남북기본합의는 진보와 보수 정부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각각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정책이자 근본적인 합의로 간주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을까? 한마디로 의회주의, 그리고 대화와 타협의 힘이었다. 특히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4당 체제 합의의 산물이자,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4당 지도자들의 지도력의 결과였다. 이념적으로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았던 노태우와 김대중 사이의 긴 의견 교환과 완벽한 타협을 보며 우리는, 민족문제의 탈진영화와 초당적 합의를 향한 두 지도자의 국량과 혜안에 놀라게 된다.

당시 급진 재야와 학생들의 통일열정과 민족주의 분출-일부는 공공연히 친북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보수정부와 합의를 추구한 반대당의 두 지도자 김대중·김영삼의 진영 초월과 의회주의는 높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여야 합의를 이루어내기 위해 최대한 야당의 의견을 수용하여 절충하려 한 노태우의 인내와 포용의 리더십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전문가의 견해와 식견을 존중한 노태우의 국정운영 역시 중요하였다. 그는 이홍구를 포함해 해당분야 전문가들의 의견과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며 정책을 결정하였다. 훗날 김대중 역시 임동원을 포함한 전문가의 견해와 제안을 최대로 존중하였다. 노태우·이홍구, 김대중·임동원 조합은 정치적 리더십과 전문가적 식견이 만난 성공사례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노태우가 진보적 지도자들과 의견을 수용하였듯, 김대중은 아예 통일·외교·안보·대미·정보분야의 초기 각료급들을 전부 보수인사들로 채웠다.

노태우-김대중 시기의 남북문제와 외교관계 성취의 첫 출발은 진영과 당파를 넘은 내부 인정과 수용이었다. 진영 적대와 청산이 아니었다. 남남대화가 남북대화의, 남남타협이 남북타협의 필수통로인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힘이자 본령이다. 전문적 의견을 듣는 열린 태도도 똑같다. 고래로 현자들이 국정에서 겸손은 인품이 아니라 능력이라고 말한 이유다.

오늘날 국정과 남북과 외교의 여러 영역들이 적대와 단절과 갈등을 노정하고 있다. 의회주의와 타협의 실종이 출발이다. (의회민주주의에서 ‘의회’는 ‘대화’와 완전히 같은 말이다.) 남북기본합의 30주년을 돌아보며, 오늘날 비핵평화·탈원전·종전선언을 비롯한 주요 사안에서 여야가-합의는 아닐지라도-어떤 대화를 통해 어떤 소통을 하였고, 또 어떤 전문가들이 어떤 자율성과 책임성을 갖고 참여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가장 좋은 정책은 늘 민주성과 전문성의 결합의 산물이다. 또한 그럴 때만이 오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