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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실용주의인가, 포퓰리즘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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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16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지난주 퇴임한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화제다. 4차례 총리 연임에 ‘세계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퓨 리서치, 2020년 9월)란 찬사 속에 퇴장한, 보기 드문 경우라서다. 여성에다 과학자이고, 루터교 목사인 부친을 따라 동독으로 이주해 슈타지의 감시 속에 유년기를 보낸 개인사까지 겹쳐놓고 보면 경이로움이 배가된다. 지난 4년간 메르켈을 밀착 관찰한 미국 언론인 케이티 마튼은 최근 출간한 『메르켈 리더십』에서 그의 리더십의 요체를 ‘실용주의’로 설명했다. “대중의 점수를 따는 데 급급하기보다 결과물을 얻는 데 집중하는” 리더십에서 비결을 찾았다.

2015년의 난민 위기 수습 과정이 상징적이다. 메르켈은 자신의 소속 정당인 기민당(CDU)과 연합정권인 기사당(CSU)의 반대에도 난민들에게 국경을 개방했다. 그러곤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트럼프로부터 “독일이 입국을 허용한 이민자들이 독일 국민들에게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트윗 조롱을 당한 쾰른 성당사건, 뮌헨 쇼핑몰 총격사건 등 비극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뼈아픈 건 자신의 정치 기반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기민당에서 갈라져 나온 극우 정당(독일을위한대안당, AfD)은 대중의 불안과 공포를 파고들며 메르켈을 흔들었다. 기민당이 제1당에서 밀려나 16년만에 야당으로 전락한 데는 AfD의 약진과, 특히 동독 지역에서 반 메르켈 정서가 확산된 게 치명적이었다. 그는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세계는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던 국가가 세계의 도덕적 중심국으로 여겨지는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다”고 찬양했다. 결과로써 존재의 묵직함을 입증해보인 것이다.

메르켈, 욕먹는 정책도 회피 않아
“독일, 도덕적 중심국 된 건 경이”
문, 인기 없는 과제는 차기 정부로
돌 맞을 각오로 결단해야 ‘지도자’

동성 결혼 합법화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는 실용주의가 돋보였다. 목사의 딸로서 자신은 지지하지 않았지만 대신 기민당 의원들의 자유투표를 이끌었고 동성애자(기도 베스터벨레)를 외무장관에 기용해 동성 결혼 허용법을 통과시켰다. 메르켈의 부모조차 반대했을 정도로 보수 우파들로부터 욕먹는 정책이었지만 회피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오면서 ‘실용주의’ 구호가 홍수를 이룬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학살자”라 부르며 비석 밟기 퍼포먼스까지 보였던 이재명 후보(민주당)가 “3저 호황을 활용해 경제 성과를 올린 건 맞다. 공과가 공존한다”고 하자 정치권이 시끌시끌하다. 이 후보는 자신을 ‘실용주의자’로 둔갑시키고는 만능키처럼 갖다댄다. “이재명은 합니다”라고 했다가 “국민이 동의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뒤집고, “삼성이 기본소득 얘기해 보는 게 어떻겠냐”더니 “자본주의 시장질서를 존중한다”고 설레발이다. 현기증 나는 표변을 ‘이재명식 실용주의’라고 눙치더니 엊그제부턴 민주당이 날치기 처리했던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를 유예하는 법을 개정하겠다며 소란을 피우고 있다. 어제 얘기와 오늘 말이 다르니, 내일은 어떻게 표변할지 두려움부터 인다. 신이 아닌 이상 ‘친일이면서 반일’이란 식의 형용 모순의 귀결점은 거짓이지 실용주의가 될 수 없다. 국민을 희롱하는 포퓰리즘일뿐이다.

‘선한 의도’가 아니라 ‘선한 결과’에 집착하는 게 실용주의다. 세상사가 무 자르듯 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좋은 결과를 위해선 지지자들을 배신할 때가 있는데, 이 고통을 감내하면서 할 일을 결단하는 게 ‘지도자’다. 키신저가 역설한대로 지지자에게 돌 맞을 각오로 난관을 돌파하는 용기가 유능한 지도자의 핵심 덕목이다. 그런데 근래 한국 정치는 이와는 정반대로 돌아간다. 진영 정치가 드리운 심연의 암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내내 40% 안팎의 콘크리트 지지를 유지해왔다. 생색나는 일엔 앞장서고, 고통이 수반되는 폼 안나는 일은 뭉개거나 다음 정부에 떠넘기는 통치술이 비결일 것이다. 적폐청산이나 임대차 3법, 기업규제 3법 같은 편가르기는 밀어붙이면서 미래를 위해 필요한 노동 개혁과 연금·재정 개혁같은 인기 없는 과제는 죄다 차기 정부로 넘겨버렸다. 그러니 절반 이상의 국민이 문재인 정부의 레거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5월11~12일 한국갤럽 조사에선 대통령이 ‘잘한 일이 없다’(34.8%)거나 ‘모른다’(25.8%)는 응답이 60%를 넘었다.)

메르켈은 보수당 출신이지만 보수당 아젠다에 함몰되지 않았고, 여성이지만 여성만 대변하지 않았으며, 동독 출신이지만 동독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았다. 다만 지난 7일 밤 퇴임식 땐 이례적 풍경이 펼쳐졌다. 메르켈의 요청으로 군악대의 송별 연주곡으로 동독의 펑크록이 연주됐다. 언론은 “동독에서 자란 것에 경의를 표시한 것인데, 재임 중엔 거의 하지 않았던 일”(가디언)이라고 평가했다. 떠나는 날에서야 동독 출신이란 정체성을 과시한 게 묘한 여운을 남긴다.

※사족 하나 : 청와대 의전비서관 탁현민씨는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제게는 남의 나라, 남의 퇴임식으로만 보이지 않았다”며 “연출적으로 훌륭했고 군더더기 없는 행사였다. 좋은 연출은 이렇게 단순하며 명료하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