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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석명의 퍼스펙티브

국가 앞날 걸린 연금개혁, 소신파 공무원이 앞장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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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연금개혁 

윤석명의 퍼스펙티브

윤석명의 퍼스펙티브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때 그리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긴축정책으로 연금이 줄어든 탓에 남들이 버린 음식을 먹으며 살던 약사 출신의 70대 노인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정부 재정 적자의 절반가량이 연금 적자를 메우기 위해 사용되던 그리스가 경험한 비극적 사태였다. 그랬던 그리스가 우리보다 훨씬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연금개혁을 이뤄냈다. 경제 위기 극복 과정에서 외부의 힘이 작용하기는 했으나, 고액 수급자의 연금을 반 토막 내는 대신, 취약계층 연금액은 늘리는 방향으로 개편이 이뤄졌다.

2021년 현재 우리 연금 현실은 어떤가. 공무원연금·군인연금 국가 부채가 지난해에만 100조원 넘게 늘어났다. 국민연금 잠재 부채는 하루에 4000억원 넘게 늘어나고 있다. 저출산에 노출된 사학연금 앞날은 재앙 그 자체다. 이런 상황에서도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려운 국가 지급 보장 조항으로 특정 세대가 잇속을 차리고 있다. 이로 인해 누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에 대해 모른 척하면서 말이다. 얼마나 후안무치한 행태인가.

국민연금 잠재 부채 하루 4000억원 넘게 늘어나는 현실
유력 대선주자들은 표에 도움 안 된다며 ‘강 건너 불구경’
일본이 연금개혁에 성공한 건 국민 생각한 공무원 덕분
관련 회의록 공개해 열악한 실상 알리고 여론 움직여야

황당한 문재인 정부 연금 개편안

2015년 공무원연금 개편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하라 했더니, 덜컥 합의한 내용이 국민연금 지급률을 높이라는 것이다. 정작 해야 할 개혁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국민연금에다 부담을 떠넘겨버려서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을까.

많은 진통 끝에 어렵게 이뤄낸 2007년 국민연금 개혁에서 급여율을 대폭 낮추다 보니, 공무원연금 급여율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급여율을 대책 없이 낮추다 보니 공무원연금액이 많아 보일 뿐이라면서…. 그러하니 국민연금은 더 올리고, 공무원연금은 조금 낮추는 것이 공적연금 강화의 길이라고 했다. 이러한 논리로 ‘공적연금 강화와 노후빈곤 해소를 위한 사회적 기구’를 국회에 설치했다. 하라는 공무원연금 개혁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 정부의 연금 공약이 만들어졌다. 연금 급여율 40%가 너무 낮으니 보험료율을 조금 올리는 조건으로 국민연금 급여율을 더 올리자는 문재인 정부 연금 개편안이 국회에 제출되게 된 배경이다. 그냥 놔두어도 2088년까지 누적 적자가 1경7000조원에 달할 국민연금을 공적연금 강화란 명목으로 골병들게 하는 개편안이 등장했다.

이러한 개편안이 얼마나 황당한지는 외국 사례를 보면 명확해진다. 우리보다 과거에는 5배 이상, 현재도 2배 이상 부담하면서, 국민소득도 우리보다 높은 독일의 평균 연금액은 125만원(943유로, 2019년 기준) 수준이다. 우리보다 보험료를 2배 이상 부담해 온 일본 역시 공무원을 포함한 연금액이 우리보다 훨씬 적다.

거의 매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공약 중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이 연금 관련 공약이다. 그런데도 대한노인회 김호일 회장은 민주당 송영길 대표에게 노인기초연금 100만원을 제안했고, 송 대표는 공약으로 검토하겠다고 화답했다. 연금 개혁의 골든타임이 지나도 한참 지난 시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수렁으로 무한 질주를 시도하려 한다. 대한민국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이 순간에 넋 놓고 무책임한 행태를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까.

연금제도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연금 더 달라고 방망이 두드리면 연금을 더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해 보이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사실과 다른 논리로 포장해 연금제도의 작동 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국민을 기만하고 선동한다. 연금제도란 누군가가 더 받으면, 누군가는 더 부담해야 하는,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제도일 뿐이다.

연금 문제가 이렇게 단순하다면, 왜 복지 선진국으로 불리는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독일·일본이 고통스러운 연금개혁을 했겠는가. 우리처럼 문제없다고 하면 됐을 일을 정권을 내주면서까지 왜 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공무원연금 재정보고서 공개 안 해

2004년 독일 연금개혁의 산파 역할을 했던 베르트 뤼루프는 세대 간 공정성 개념으로 국민을 설득했다. 공정 개념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은 쉽지 않으나, 어느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 비해 월등하게 손해를 많이 보고 있다면 공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불공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연금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독일 국민이 받아들였기에 획기적 방향 전환이 가능할 수 있었다.

유력 대선후보들이 연금개혁은 회피하면서도, 호시탐탐 포퓰리즘 정책을 내세울 기회만 엿보는 우리 정치 현실에서 연금개혁이라는 위험한 일을 누가 주도해야 할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쥐들의 이야기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면 잡아먹힐 위험을 사전에 알 수 있을 터인데, 잡아먹힐 수도 있는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이냐를 의논하는 이야기다. 연금 분야에서는 1981년 칠레 연금개혁을 담당하였던 호세 피뇨라 노동부 장관으로 인해 유명해진 문구다.

사나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 공유가 필요하다. 핀란드는 재정계산보고서를 다른 나라에서 검증받는다고 한다. 캐나다는 재정계산보고서 작성 책임자가 양심을 걸고 자신의 지식을 최대한 활용한 객관적인 보고서라는 서술문에 사인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2020년 공무원연금 재정계산보고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함에도 공무원연금공단 홈페이지 자료실에는 2019년 3월 이후 어떤 자료도 올라오지 않고 있다. 군인연금은 깜깜이 그 자체다. 2020년 사학연금 재정계산보고서는 1년 이상 지난 2021년 11월에야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국민연금은 어떠한가. 2018년 국민연금 재정계산에 근거한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의 파행 운영에 반발하면서 한 위원이 중도 사퇴했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파행적으로 위원회가 운영됐기 때문이다. 고뇌에 찬 위원들의 발언을 담은 위원회 회의록은 비공개 상태다. 공무원 등이 포함된 연금 재정계산보고서는 물론이고, 위원회 회의록으로 요약 버전이 아닌 전체 발언 내용을 발언자 실명과 함께 후생노동성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일본과 대비된다.

연금개혁 첫 단추는 팩트 공유

연금개혁의 첫걸음은 팩트 공유에 있다. 제대로 된, 정치 중립적인 전문가가 밝히고자 하는 팩트를 국민에게 알릴 책무가 언론에 있다.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팩트를 공론화해야 할 몫은 정치권에 있다. 20대 국회 하반기 보건복지위원장을 역임한 김세연 의원은 “나쁜 어른이 되지 말자”고 말했다. 연금개혁에 소극적인 정치권을 성토하며 그는 국회의원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치권에서는 연금개혁을 강조한 박용진 의원, 윤희숙·유승민 전 의원이 좋은 사례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는 국민연금·공무원연금 등 공적연금의 지급·부담 기준을 일원화하는 동일연금제 공약을 발표한 후 유력 대선후보에게 연금 공약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심상정 후보도 연금 개편안을 준비한다고 한다.

연금 전문가의 고민이 담겨있는 위원회 회의록이 공개되고, 그것을 언론이 공론화하면서 문제의식을 지닌 정치인이 쟁점화할 경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다. 의지가 있는 곳에 길도 생기는 법, 우리 사회의 양심 세력이 모여 이 문제를 공론화할 경우, 공정 이슈에 민감한 MZ세대 일부가 힘을 보탤 것이다. 우리를 이만큼 먹고살 수 있게 해 준 양심적 노인세대 역시 힘을 보탤 가능성이 높다. 자식 세대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제대로 된 재정계산보고서와 고뇌에 찬 전문가 위원의 회의록 발언 공개, 정치인들의 공론화, 이를 통한 사회적 이슈화 과정이 연금 개혁에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는 정도가 될 수 있다. 이를 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는 공무원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공무원이 돼 직무에 충실한 공무원 말이다. 정치에 오염된 일부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도 국민 입장에서 국민과 사실을 공유하려는 공무원의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좋은 결실을 볼 수 있다.

타산지석 삼을 만한 일본 공무원들

지난 11월 25일 개최된 한국연금학회와 일본 전문가와의 국제 심포지엄에서 나온 일본 발표자들 발언이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준이치 사카모토(坂本 純一) 전 후생노동성 수리과장과 히로노부 우에다(植田博信) 후생노동성 관리관의 발언이다. 일본이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을 통합한 공적연금 일원화와 100년 후인 2120년까지도 연금재정 안정을 달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공무원이 국민 입장에서 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도 했다. 우리도 공무원이 국민 입장에서 일하면서, 팩트를 널리 알리려고 노력한다면 어렵게 보이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다.

현시점에서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재명·윤석열 두 후보는 대선이 100일도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도 연금 관련 공약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실 공유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양심세력이 똘똘 뭉쳐, 이들이 제대로 된 연금 공약을 내놓을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