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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퍼스펙티브

뒷전 밀린 이대녀 “우리는 대체 누굴 뽑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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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30 여성과 대선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19대 대선 때 주요 후보들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다. 충격적인 여성혐오 범죄인 강남역 살인사건 다음 해에 열린 선거였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안철수 국민의당·유승민 바른정당·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입 모아 “여성들이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외쳤다. 그리고 최초의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탄생했다.

이번 대선 분위기는 영 딴판이다. 막판까지 접전이라 부동층이 제일 많은 2030에서 성패가 갈릴 것이라며 2030 잡기에 사활을 걸지만, 정치적 구애는 이대남(20대남성)에게 쏠렸다. 이대녀(20대여성)의 자리는 잘 안 보인다. 지난 4·7 재·보궐 지방선거 때 확인한 이대남의 표 결집력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 흐름이 거세지고 그에 대한 백래시(반격) 또한 거세지면서 역차별을 호소하는 남성 유권자들을 의식해 ‘안티 페미니즘’ 기조에서 치르는 선거다. 일부 레디컬 페미니즘의 문제를 페미니즘 일반의 문제로 확대·왜곡했다.

2030 남성 표 결집력 노린 정치권
여야 모두 이대남 구애 전력 질주
안티 페미니즘 기조의 이번 대선
제대로 된 성평등 공약도 실종

#‘여혐 대선’ 멈추라는 2030

지난 12일 2030 여성단체인 샤우트아웃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2022년 여성혐오 대통령 선거 규탄시위’를 열었다. [뉴스1]

지난 12일 2030 여성단체인 샤우트아웃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2022년 여성혐오 대통령 선거 규탄시위’를 열었다. [뉴스1]

“여성들에게 이번 대선은 최악과 차악의 대결이 아니라 최악과 최악의 대결이다” “여혐 대선 웬 말이냐” “우린 대체 누굴 뽑냐”.

급기야 2030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다. 2030 여성단체 샤우트아웃 회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연 ‘여성혐오 대선 규탄 시위’ 현장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다. 이들은 여야 공히 여성가족부 폐지 등 남초 커뮤니티에서 줄기차게 요구해온 의제들을 수용하면서, 반페미니즘에 기반한 포퓰리즘 선거를 치르고 있다고 지적했다(여가부는 얼마든지 폐지될 수 있지만, 일 못 하는 여가부를 일 잘하게 바꾸는 것과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해 없애버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참석자들은 “선거권을 얻은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이 한 명의 유권자이자 국민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며 “국민의힘 청년정책에 여성의 자리는 있는가”라고 물었다. 민주당에 대해서도 “여당은 어차피 여성은 민주당을 뽑을 테니,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남성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자는 행보를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성폭력 무고죄가 피해자의 입을 막기 위해 악용되는 엄연한 현실 속에서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를 주요 젠더 공약으로 내세운 윤석열 후보나 과거 변호했던 조카의 잔혹한 살인사건을 가벼운 데이트폭력 정도로 축소하고, 여혐 성향이 강한 남초 커뮤니티를 순회하는 이재명 후보 모두 비판했다. 결론은 여야 공히 “이대남의 표심에 달려들지 말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성 평등 공약을 만들어달라”는 주문. 한편 이 자리에는 ‘페미니즘 반대’를 외치는 신남성연대 회원들의 맞불 집회도 열렸다. 상당수가 10대 청소년이었다.

#2030중에서도 찐 부동층, 이대녀

‘이대남 잡기, 이대녀 뒷전’ 전략의 원조는 국민의힘이다. 2030 남성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이준석 대표가 주도해 4·7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을 승리로 이끌었다. 성별 갈라치기 전략의 폐해도 속속 드러나는 중이다.

민주당은 뒤늦게 이대남 구애에 뛰어들었지만 별 재미는 못 보는 상황이다. 이대남의 전반적인 보수화에 더해 그나마 우호적이던 이대녀의 반발만 사기 때문이다(2030 여성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가 많았으나 민주당 인사들의 잇따른 권력형 성폭력 사건과 그에 대한 당의 미흡한 대응을 계기로 틈새가 벌어졌다). 이재명 후보 자체가 불륜설과 형수 욕설 발언 등으로 여성들의 호감도가 낮은 데다가 최근 당 인사들이 야당을 공격하면서 보여준 잇단 ‘젠더 감수성 제로’ 발언들이 점수를 깎아 먹고 있다. 이재명 후보 부인 김혜경 씨와 윤석열 후보 부인 김건희씨를 출산 여부로 비교하거나 30대인 조동연 전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과 50대인 이수정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의 외모 비교, 김건희 씨에 대한 과거 사생활이나 성형 의혹 제기 등이 그 예다.

2030 여성들이 민감한 성 소수자 이슈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후보는 서울대 금융경제세미나 초청강연회를 마친 후 성 소수자임을 밝힌 청년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자 발언이 끝나자마자 “다 했죠?” 한마디를 던지고 자리를 떴다. ‘말 다 했으니 된 거 아니냐’는 식의 태도였다. 국민의힘에서는 “성 소수자도 약자인가”(허은아 의원)라는 발언까지 나왔다.

그런데 지난 8일 리얼미터와 오마이뉴스의 여론조사에서는 부동층이 많은 2030에서도 20대 여성의 부동층이 제일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20대가 부동층이 가장 많은 연령대인데, 그중 20대 남자 부동층은 13.5%로 20대 평균보다 낮고 20대 여자 부동층은 23.7%로 전 세대 중에서 가장 높았다. 30대 부동층도 남자 8.3%, 여자 12.8%로 역시 여자가 높았다. 마지막 승패의 키를 쥔 ‘찐 부동층’이 이대녀란 얘기다.

이대녀에게 가장 적극적인 곳은 정의당이다. “삶 자체가 페미니즘”이라는 심상정 후보가 2030 여성에게 인기 높은 장혜영·류호정 의원을 전면에 포진시키며 그 어느 때보다 페미니즘 정당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20대 여성을 겨냥한 토크 콘서트를 여는가 하면, 여성계의 요청이 높은 ‘비동의 간음죄’ 신설을 주요 젠더 공약으로 제시했다. 지난 10일 리얼미터·오마이뉴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심상정 후보의 지지율은 20대 여성(18, 19세 포함)에서 13.4%로 모든 성별·연령대에서 제일 높았다. 30대 여성의 지지율도 8.1%였다.

#정체성 정치 시대 열리나

20대 여성들은 지난 4·7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 15.1%가 성 소수자 후보를 포함, 무소속· 소수정당 후보에게 표를 던져,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거대 양당 중심의 한국 정치 지형에 작지만 의미 있는 균열을 예고하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무소속으로 당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신지예 한국정치여성네트워크 대표는 최근 주변에서 ‘내 표를 죽지 않게 하려다가 내가 죽겠다’는 푸념을 듣는다고 했다. 사표방지 투표행태에 대한 얘기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사표방지 심리로) 이길만한 쪽에 표를 주기 위해 민주당 아니면 국힘을 뽑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20대 여성들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내 표가 사표가 될 줄 알면서도 투표장에 가서 당선 가능성이 낮은 기타 후보를 찍었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새로운 집단의 등장이다. 그런데 정치권에선 이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2030 여성을 중심으로 ‘정체성 정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체성 정치는 성별·인종·종교 등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나뉜 집단이 권리를 요구하는 데 주력하는 정치다. 정치적 올바름,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 등이 주요 이슈가 된다. 물론 서구 좌파들 사이에서는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는 의견도 많다.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집단적 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인정을 획득하는 것으로 환원된다”(『오인된 정체성』)는 요지다. 체제 변혁을 불가능하게 하고, 누가 더 약자인지 ‘약자 배틀’을 벌인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2030을 필두로 10대에 이르기까지 젠더 감수성, 소수자 인권의식이 높아지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기존 양당 중심, 진보·보수로 나뉘지 않은 새로운 정치 흐름이 강화될 가능성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지금 현실은 거대 양당 후보가 모두 2030 여성에게서 가장 지지율이 낮고 “이대녀 표심이 여야 후보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다 보니, 후보들이 역설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고 이대남 눈치만 보는”(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 상황이다. 어차피 이대녀는 우리를 찍지 않을 것이니 젖힌다는 계산이다. 반대자까지 품기는커녕 특정 성별과 국민을 배제하는 대선 전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치공학적으로 성별을 갈라쳐 선거에서 이긴다 한들, 선거로 인해 깊어진 젠더 갈등은 부메랑이 돼 더 큰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올 게 뻔한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