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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치는 조선인 후금 장수…“역사를 결과론적으로 보지 말았으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웹툰 ‘칼부림’.

웹툰 ‘칼부림’.

네이버 웹툰 ‘칼부림’은 17세기 초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이 배경. 이괄의 난에 참여했다 역적이 돼  후금(청나라)에 투신하는 주인공 함이의 기구한 인생을 다룬 정통 시대극이다.

역사 마니아 등 독자들이 열광하는 건 탄탄한 고증이다. 칼과 활만 난무하던 기존 사극에서 보기 어려운 편곤(鞭棍·도리깨 모양으로 만든 무기)이 등장하고, 당시 체형을 고려한 듯 장수들도 땅딸막한 키로 그려지는가 하면, 함경도 사투리는 물론 만주어도 나온다. 인조·광해군·이괄·최명길 등 굵직한 역사적 인물 외에 항왜(降倭·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 상인 등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시대를 입체적으로 그렸다. 사료와 학계 연구를 토대로 인조 정권과 후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묘사한다.

당초 네이버 웹툰 베스트도전(누구나 자유롭게 작품을 올리는 공간)에 등장했다가 정식 연재로 승격됐다. 2013년 12월 시작한 연재가 만 8년째. 이괄의 난에 참여한 함이는 시즌 4부에 접어든 현재, 후금의 군대에 합류해 조선을 공략 중이다. ‘칼부림’의 고일권 작가에게 물었다.

고일권

고일권

주인공이 조선을 치는 후금의 장수가 되는 건 대담한 연출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인데 국적이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했다. 조선을 아프게 한 그 나라와 사람들을 악마와 승냥이라는 위치에서 동등한 사람의 위치로 돌려놓는다면 더 극적인 역사가 펼쳐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조선이 타국 역사와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함께 호흡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함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독자들이 명·청교체기 한복판에 온전히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복식, 무기, 언어 등 고증에 극찬이 이어진다.
“작품을 준비한 게 2010년, 데뷔가 2013년이다. 3년간 맨땅에 헤딩하듯 자료를 수집했다. 처음엔 필요하다 싶은 책과 도록을 다 샀다. 기존 작품을 참고하되, 답습하지 않으려 했다. 애초 사극을 한  이유가 기존 사극에 대한 실망이었기에 고증은 중요했다. 좌충우돌했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요령을 피우지 않은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그의 전공은 역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다.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가운데)과 함이(오른쪽). [네이버 웹툰]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가운데)과 함이(오른쪽). [네이버 웹툰]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항왜 집단의 등장이 인상적이다.
“항왜들은 본향에 가족을 두고 돌아가지 못한 이방인들이다. 더러 조선에 순응했고 더러 저항하며 흡수됐다. 당시 조선엔 이들 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군대 후손, 후금을 피해 도망친 요동 사람들, 후금에 복속하지 않은 여진족, 심지어 표류한 네덜란드인 등 여러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조선인과 부대끼고 살았다. 나라의 강약을 떠나 떨어져 나온 자들은 언제나 고단한 법이다. 그 고단함이 와 닿았다. 그들의 여정이나 혹은 그 존재만으로도 울림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대 연구는 어떻게 했나.
“많은 기존 연구의 편린을 가져다가 작가적 상상을 더한 것뿐이다. 논문들을 보면서 ‘이렇게 연구가 활발한데 왜 대중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 돼 있을까’ 생각했다. 작품 초반 등대 역할을 한 건 한명기 명지대 교수의 책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다.”
연출이 입체적이다. 말하려는 메시지는.
“‘역사를 결과론적으로 보지 말자’는 것. 지금의 지식과 시각을 온전히 가지고 과거로 가도 그 시대를 개혁시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1년 전이어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반성한다는 핑계로 당대인들의 삶을 함부로 부정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역사의 끄트머리에 존재하는 최종 결과물이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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