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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선언이나 다름없다" 러 분노한 '스위프트 제재' 뭐길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이 러시아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스위프트ㆍSWIFT) 접근을 차단하는 것은 전쟁 선언이나 다름없다.”

2019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총리는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정부의 우크라이나 협상 특별대표였던 커트 볼커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러시아에 대한 스위프트 접근 차단을 (협상) 테이블 위에 놓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군이 크림반도 인근 케르치해협에서 우크라이나군을 공격하자 볼커 특사가 엄포를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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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조치는 실행되지 않았고, '말'뿐으로 끝이 났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발끈한 이유는 스위프트 제재는 거의 모든 국제 금융 거래 봉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핵 옵션’에 비유될 만큼 강력한 제재로 꼽힌다.

지난 9월 11일 러시아군과 벨라루스군이 러시아의 니즈니 노보고로드 지역에서 양국 연합군사훈련인 자파드 2021을 진행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에 병력을 집결시키며 군사 긴장을 높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9월 11일 러시아군과 벨라루스군이 러시아의 니즈니 노보고로드 지역에서 양국 연합군사훈련인 자파드 2021을 진행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에 병력을 집결시키며 군사 긴장을 높이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로선 당시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스위프트 제재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2014년 크림반도가 강제 병합된 이래 최고조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군사 긴장감이 높아지면서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3일(현지시간) 미 정보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가 내년 초 약 17만 5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7일 열린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문제를 주된 안건으로 논의했다. 회담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에 군사 긴장을 계속 고조시키면 미국과 동맹국은 강력한 경제적·비경제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요 외신은 "바이든 정부가 러시아와 독일을 직접 연결하는 천연가스 송유관인 '노드스트림2' 제재와 러시아의 스위프트 퇴출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의회도 지난 4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러시아의 스위프트 배제를 추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서방이 지상군을 투입하는 대신 러시아의 주 수입원인 천연가스 수출과 금융 활동을 막아 러시아를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미국-러시아 정상회담 현안 입장 차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미국-러시아 정상회담 현안 입장 차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게 뭐야

스위프트는 달러화로 국제 금융거래를 할 때 필요한 글로벌 결제 시스템을 운영하는 비영리조직이다. 1973년 설립돼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두고 200개국 1만1500여 기업이 사용하고 있다. 개인이 은행으로 달러 송금을 할 때도 스위프트 코드가 적용돼 접근이 차단되면 해외로 송금할 수 없게 된다.

현재 이란과 북한이 핵 문제와 관련해 스위프트 접근 차단 제재를 받고 있다. 2012년 스위프트에서 퇴출당한 후 이란은 석유 수출과 무역에 난항을 겪어 치명상을 입었다. 반(反)이란 성향의 미 씽크탱크 민주주의수호재단(FDD) CEO인 마크 두보위츠는 "스위프트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전자 혈류"라고 평가했다.

이게 왜 중요해  

미국의 스위프트 제재 카드는 '달러 결제망'에서 러시아를 퇴출해 고립시키겠다는 의도다. 러시아중앙은행(CBR)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 무역에서 수출 달러 결제 비중은 약 60%를 차지했다. 지난 5월 국제 제재 전문가 마리아 샤기나 취리히대 연구원은 모스크바 카네기 센터에 올린 칼럼에서 "스위프트 제재가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파괴적일 것"이라며 "모든 국제 거래가 끊기고 통화 변동성이 확대되며 대규모 자본 유출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 역시 스위프트 차단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서구의 제재가 본격화한 2014년 이후 '탈 달러화'를 추진해왔다. ▶스위프트를 대체할 자체 금융 결제망인 러시아금융통신시스템(SPFS)을 가동했고 ▶국제 결제가 가능한 카드인 미르(Mir)를 만들었으며 ▶중국국제결제시스템(CIPS)과 SPFS를 연계하는데 합의했다.

하지만 샤기나 연구원은 이 같은 노력에도 러시아가 달러의 그늘을 벗어나기엔 역부족이라고 평가했다. SPFS에 가입한 400여개 은행은 대부분 러시아계다. 도이체방크(독일), 유니크레딧(이탈리아) 등 서방의 주요 은행들은 아직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미르 역시 갈 길이 멀다. 러시아 국내에선 거래 비중이 24%까지 늘었지만, 해외에서 미르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국가는 우즈베키스탄 등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SPFS와 연계한 CIPS 역시 스위프트를 대체하기엔 존재감이 미미하다. 국제 금융 시장에서 위안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2% 미만으로 유로화, 파운드화, 엔화에도 밀린다. 그 결과 CIPS의 규모는 스위프트의 0.3%에 불과하다고 샤기나 연구원은 전했다.

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관저에서 비디오 링크를 통해 시민 사회 및 인권 개발을 위한 러시아 대통령 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관저에서 비디오 링크를 통해 시민 사회 및 인권 개발을 위한 러시아 대통령 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부작용은 없나

서방이 러시아를 스위프트에서 차단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2014년 9월 당시에도 EU 의회는 러시아를 스위프트에서 퇴출하는 결의안을 승인했다. 하지만 제재가 현실화한 적은 없다. 서방 역시 손해를 각오해야 하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당시 기사에서 "스위프트에서 러시아를 배제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모스크바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러시아가 국제 결제를 위한 통화 시스템을 마련하는 날을 앞당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위프트 외에 러시아의 결제 시스템이 힘을 키워 스위프트의 현행 독점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전 세계 결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데다 미국이 가진 달러 패권이 쪼그라들 수 있어 서방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시나리오다.

또 FT는 "러시아가 스위프트에 속해 있으면 러시아 국민과 기관의 돈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서구가 쉽게 감시할 수 있는 효과도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았던 체코ㆍ오스트리아 등 일부 EU 회원국들은 제재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에 미국의 대러 제재는 러시아의 주요 산업인 에너지ㆍ군수품ㆍ금융 등 부문에서 기업인의 자산을 동결하고 러시아 정부 관료의 입국을 금지하는 식으로 행해졌다.

앞으로는

스위프트 제재가 현실화할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러시아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블라디미르 자바로프 러시아 상원 연방외교위원회 부위원장은 7일 러시아 국영언론 타스와의 인터뷰에서 "스위프트 차단 조치는 환상의 영역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는 동반자가 많은 거대한 국가"라며 "(제재가 이뤄지면) 독일은 러시아가 공급한 천연가스의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제재를 가하면 가스관이 폐쇄돼 유럽 전역에 에너지 대란이 발생할 텐데, EU의 불만을 미국이 감당할 수 있겠냐는 엄포다. 실제 미국은 트럼프 정부 시절 대이란 스위프트 제재로 인한 무역 문제로 EU와 여러 차례 갈등을 빚은 바 있다.

7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시간 가량 화상 정상회담을 가졌다. [AFP=연합뉴스]

7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시간 가량 화상 정상회담을 가졌다. [AFP=연합뉴스]

반면 미국이 손해를 감수하고 제재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7일 "바이든 대통령이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하지 않았던 일을 할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또 CNN은 9일 익명의 행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미국과 동맹국은 제재의 부수적인 위험을 인식하고 있다"며 "러시아의 침략을 출혈 없이 억제할 수 있는 수술용 메스와 같은(scalpel-like) 제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있다"고 보도했다.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강력 제재가 불가피하다는 데 공감대가 있단 뜻이다. 바이든은 푸틴과의 회담에 앞서 프랑스·독일·이탈리아·영국 등 유럽 동맹국 정상들과 전화 통화를 하고 공조 방안을 조율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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