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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라이프스타일 필로소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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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주요 서점에서는 독자들이 ‘올해의 책’을 선정 중이고, 소셜미디어에서는 지인들이 ‘올해 읽은 책 10’을 선별해서 포스팅하는 중이다. 얼마 전 나 역시 연례 행사처럼 이 일을 치렀다. 막상 골라 보면 아주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무엇을 읽느냐 보다 자신을 선명히 드러내는 행위는 드물다. 책을 처음 살 때도, 책장에 보관할 때도, 혹여 버릴 때도 우리는 무척 신중하다. 독서를 통해서 자기 삶의 가장 깊은 가치가 표현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올해의 책’으로 고른 책들을 살피면, 한 해 동안 자신이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는지, 세상이 어떻게 변했으면 하고 꿈꾸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한 해 독서의 핵심을 공개하는 건 ‘진짜 나’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책 통해 제대로 바라보는 힘 키워야
올해 일상에 사유 더하라는 책 인기
인생엔 ‘더 많이’보다 ‘더 깊이’ 필요
당신은 올해 어떤 책을 읽었는가

성인 두 명 중 한 명은 책을 읽지 않고 하루 종일 스마트폰에 코 박고 살아가는 나라에서 책 고르기 이야기는 생뚱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책은 여전히 지식의 총화이고 정보의 정수이며 지혜의 저장소다. 무엇보다 책은 특정 주제에 관한 흩어진 지식과 정보를 선별하고 종합해 하나의 서사적 전체로서 조감하는 눈을 제공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눈을 자기 안으로 데려오는 일이다.

전체를 생각하는 힘이 없을 때 우리 중 누구도 좋은 삶을 살 수 없다. 세상에는 내 겨자씨만 한 생각을 넘어서는 큰 지혜의 바다가 있다. 산만한 주의는 우리를 헤매게 하고, 좁은 시야는 우리를 넘어뜨린다. 겨자씨보다 작은 내 생각을 넘어서는 사유의 우주가 있음을 깨닫고, ‘내가 옳다’는 아집에서 벗어나 겸손히 자신을 관조하지 않는 한 아무도 더 나은 지혜에 이를 수 없다.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사물이나 사태를 제대로 바라보는 힘을 얻는 것이 행복의 첫걸음이다.

희랍인들은 이 때문에 신의 눈으로 보기를 갈망했다. 겉으로 보이는 세계의 혼돈을 넘어서 신적인 질서를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싶어 했다. 그들은 신이 보는 세계를 테오리아(theoria)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론(theory)의 어원인 이 말은 테오레인(theorein)에서 왔다. ‘보다, 숙고하다, 관조하다, 깨닫다’ 등의 뜻이다. 보기는 보되 깊게 생각하면서 보는 일이고, 한 걸음 떨어져 보는 일이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일이다. 이럴 때 인간은 신처럼 볼 수 있고 성인처럼 행동할 수 있다.

올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독특하게 눈에 띄는 것이 ‘테오리아’에 대한 갈망이다.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조니 톰슨의 『필로소피 랩』 등 철학을 일상을 사유하는 도구로 쓰려는 마음의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라틴어 수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등 일상에 사유의 깊은 우물을 더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책들이 최근 몇 년 동안 해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을 보면, 알랭 드 보통 이후 주로 영미권에서 인기를 끌던 ‘라이프스타일 필로소피’가 국내에도 확고하게 자리 잡는 느낌이다. 이들은 철학을 진리 탐구의 도구보다 비루한 세상에서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와이너는 스마트폰 속의 지식과 정보는 아무리 먹어 치워도 충족되지 않는 배고픔을 가져온다면서 현대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지혜라고 말한다. 이 책은 우리의 일상을 철학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면서 철학의 목소리를 좇으라고 권한다.

아우렐리우스처럼 소명을 품고 깨어나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지 않을 것이다. 루소처럼 숙고하면서 걷는다면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처럼 주어진 것에 만족한다면 인생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니체처럼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충실하다면 생을 한 번 더 똑같이 반복해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몽테뉴처럼 자신에게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면서 산다면 후회 없이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 순간순간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가치가 정해진다.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물질의 풍요보다 정신의 만족이다. 두 번 살 수 없기에, 인생엔 ‘더 많이’보다 ‘더 깊이’가 필요하다. 쌓아두어도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자 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절대 왕자로서 살지 못한다. 읽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운 삶을 알지 못한다. 좋은 삶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충만하게 살고 행복한 죽음에 이른다. 이 책을 디딤돌 삼아 『에세』나 『고백』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원전 읽기로 나아가면 좋을 것이다.

재난의 시대에 사람들은 고통과 불안을 견디는 지혜를 갈망한다. 올해에는 철학책도 꾸준히 읽혔지만,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 매트 헤이그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등 재난을 넘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문학도 많이 팔렸다. 이대로 살 수 없기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삶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쏟아지는 정보에 취해서 길을 잃고, 누군가는 책을 길잡이 삼아서 지혜의 길을 살아간다. 묻고 싶다. 당신은 올해 어떤 책을 읽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