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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버린 세상 ‘지옥’에 던져진 천사들의 묵시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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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5호 24면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사진 국립극단]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사진 국립극단]

국립극단이 오랜만에 대작을 내놨다.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극작가’로 불리는 토니 쿠쉬너의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1990년대 영미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다. 공연 시간이 총 8시간에 달하는데, ‘파트1: 밀레니엄이 다가온다’가 지난주 개막했다. ‘파트2’는 내년 2월 공연된다.

턴테이블과 와이어액션 등 뮤지컬급 스케일의 무대 장치부터 남다르고, 연출은 ‘그을린 사랑’ 등으로 요즘 연극계에서 가장 핫한 신유청이 맡았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스타 정경호의 연극 데뷔작으로도 화제다. 영상의 시대 한복판에서 희곡부터 연출, 배우, 무대까지 모든 것을 최고치로 끌어올려 연극의 존재감을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198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혐오증에 시달리는 에이즈 환자들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다. 유대인 청년 루이스는 동성 애인 프라이어가 에이즈에 걸리자 충격에 빠져 도망치고, 몰몬교도인 법무관 조에게 다가간다. 평생 보수적인 종교관에 갇혀 살던 조는 루이스를 만나 커밍아웃을 하고, 극보수의 상징이면서 동성애자인 변호사 로이 콘은 에이즈 감염을 숨기고 암 환자 행세를 한다.

요즘 최고 화제인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떠오르는데, 욕망하는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종교에 대한 도발이라는 점에서다. ‘지옥’에 신흥종교 ‘새진리회’가 있다면, ‘엔젤스’에는 몰몬교가 있고, 둘 다 ‘천사’를 주요 모티브 삼아 종교적 상징들을 바탕에 깔았다. “성서라는 완벽한 턴테이블 위에 80년대 미국 시대상황이라는 LP판을 조심스레 얹어놓고 연주를 듣는 느낌”이라는 신유청 연출의 말은 2000년 전 성서가 죄인으로 규정한 인간을 지금도 똑같이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같다.

‘지옥’의 질문도 비슷하다. 2022년 서울 한복판. 대낮에 괴물이 나타나 사람을 처참하게 불태워 죽이자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새진리회의 교주 정진수는 이를 신이 죄인을 단죄하는 지옥의 ‘시연’이라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가진 미혼모 박정자에게 시연을 고지하는 ‘천사’가 나타나고 시연이 생중계되자 ‘새진리회’의 주장은 진리가 된다. 누군가 ‘천사’의 고지를 받은 것이 알려지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사람들은 수치를 모면하려 발버둥친다.

‘엔젤스’에서는 에이즈 환자들이 ‘죄인’ 신세다. 당시 게이 공동체에 집중 발생했던 에이즈가 신의 섭리이자 응징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범적이고 가정적인 남성상을 대표하던 배우 록 허드슨이 85년 발병하면서 방탕한 죄인이 아니라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지옥’ 속 신의 섭리가 인간의 의지로 극복되듯, ‘엔젤스’가 묵시하는 것도 결국 희망이다. 프라이어가 창세기의 야곱처럼 천사와 벌이는 씨름은 종교의 굴레로 자신을 부정해온 사람들의 고독한 싸움이지만, 고통이 아닌 쾌락을 동반한다. ‘지옥’에서 간음의 굴레를 썼던 박정자의 부활이 그가 죄인이 아닌 메시아임을 암시하듯, 프라이어도 케케묵은 신의 율법을 극복한 예언자로서 부름 받는 것이다. 이 씨름 뒤에 어떤 미래가 찾아올까. ‘파트2’의 제목은 ‘페레스트로이카(재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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