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위 활동을 거부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2일 제주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향해 윤 후보 측근을 선대위에서 배제하라고 요구했다. 저녁때는 "당 대표는 대통령 후보의 부하가 아니다”란 말도 했다.
이 대표는 이날 제주에서 기자들과 만나 “후보가 배석한 자리에서 ‘이준석이 홍보비를 해 먹으려고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인사가 있다”며 “모른다면 그냥 가고, 안다면 인사 조처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당 대표가 자당 대선 후보와 배석한 특정 인사의 문제 발언을 공개하고, 해임 등의 조치를 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당 상임 선대위원장인 이 대표는 홍보미디어 총괄본부장도 겸하고 있다. 국민의힘에서는 이번 대선에서 홍보 예산이 약 300억원 이상 집행될 것으로 전망한다. 정치권에선 “윤 후보 측이 이 대표가 막대한 예산을 다루는 홍보본부를 맡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뒷말이 나돌긴 했지만, 이 대표가 직접 이것이 사실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당 관계자는 “후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선대위 인사는 극소수”라며 “대표 입에서 ‘홍보비를 해 먹으려 한다’는 발언이 공개된 자체가 당 입장에선 엄청난 타격”이라고 우려했다.
전날 부산과 전남 순천·여수를 방문한 이 대표는 이날 오전 배편으로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장과의 오찬에 이어 평화공원 참배를 마친 이 대표는 취재진과 만나 윤 후보 측에 대한 노골적 불만을 쏟아냈다.
이 대표는 당무 거부 논란에 대해 “당무 거부라고 하는데 나는 우리 후보 선출 뒤 후보의 의중에 따라 사무총장 등이 교체된 이후에는 당무를 한 적 없다”고 말했다. “(조직부총장, 전략기획부총장이었던) 김석기·성일종 의원을 (윤한홍·박성민 의원으로) 교체해달라고 권성동 사무총장이 요청한 것 외에는 어떤 보고나 협의도 없었다”는 것으로, 이른바 ‘대표 패싱’ 논란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이 대표는 “(윤 후보 측이) 제가 하라는 것은 다 안 했다. 사전 상의를 요청한 것은 없었고 이수정 교수 영입 등에 있어 대부분 정해진 사항만 통보했다”는 말도 했다.
윤 후보 측 인사들을 만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대뜸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얘기를 꺼내며 “김 전 위원장이 원치 않는 시점에 원치 않는 인사를 보내 상황이 악화한 것”이라며 “우리 당 의원들은 사람에게 충성하는 행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 후보가 검사 시절인 2016년 국정감사에서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한 발언을 인용한 것이다.
윤 후보의 과거 발언에 빗대 윤 후보를 공격하는 발언은 또 있었다. 이 대표는 이날 저녁 JTBC 인터뷰에서 “당 대표는 대통령 후보의 부하가 아니라 협력하는 관계”라고 말했다. 이는 윤 후보가 검찰총장 시절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을 향해 “검찰총장은 장관 부하가 아니다”라고 발언한 것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윤 후보가 “이 대표가 리프레시(재충전)하러 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서도 이 대표는 “저는 후보에게 그런 배려를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이 대표의 발언은 '윤 후보측'이나 이른바 ‘윤핵관(윤석열 후보 측 핵심 관계자)’이 아니라 윤 후보를 직접 겨냥해 불편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김병준 상임선대위원장 등 '윤 후보 측' 인사를 향해서도 냉랭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이 대표는 제주에서 “나는 김병준 위원장을 총괄선대위원장이라고 생각하고 운영했으면 한다. 언론 활동도 열심히 하는 김 위원장의 (활동) 공간을 위해 나는 지방 일을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선 “‘어디 한 번 김 위원장이 다 해보라’고 비꼬는 뉘앙스로 들렸다”(중진 의원)는 평가가 곧장 나왔다. JTBC 인터뷰에선 김 위원장이 조동연 민주당 공동 상임선대위원장에 대해 “아주 예쁜 브로치 하나를 단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발언 자체가 잘못됐다. 60세 넘은 분에게 가르쳐 드릴 수도 없고…”라고 비판했다.
'윤핵관' 논란에 “사리사욕에 충성하는 분들 같다”라고 비판한 이 대표는 “윤 핵관은 여러 명이다. 김종인 위원장이 과거 '파리떼'라고 한 이들이 상대 후보가 아닌 김 위원장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6일 열릴 당 선대위 발족식 참여 여부에 대해 “미정”이라고 덧붙였다.
이 대표가 대선을 97일 앞두고 윤 후보를 정면으로 들이받자 당은 크게 술렁였다. 당 관계자는 “두 사람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보수 정당에서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라고 우려했다.
당내에선 이 대표가 선을 넘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익명을 원한 3선 의원은 “대선을 앞두고 당 대표가 내부 진지에 폭탄을 던진 격”이라며 “윤 후보 측의 부적절한 발언도 충분히 당 안에서 진위를 확인해 조치할 수 있었을 텐데 당 밖에서 후보를 공격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가 언급한 ‘홍보비 해 먹으려 한다’는 발언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추측도 이어졌다. 한 야권 인사는 “이 대표 발언 맥락상 최소한 선대위 윗선이거나, 중책을 맡은 인사일 것이라는 말이 당내에 파다하다”고 전했다. 이 대표가 '인사 조처'를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현재 선대위에서 주요 보직을 맡으면서 윤 후보와 머리를 맞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몇몇 인사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윤 후보 측 여러 인사는 “내부적으로 확인이 되지 않는 내용"이라고만 했다.
당내에선 극단으로 치닫는 ‘윤석열·이준석 갈등’을 둘러싼 위기감이 퍼지고 있다. 특히 전날 채널A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내이긴 하지만 윤 후보(34.6%)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35.5%)에게 처음으로 밀렸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당내에서는 “지금 집안싸움 할 때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국민의힘 중진 의원은 “이 대표가 존재감 부각을 위해 의도적으로 후보와 당을 위기로 몰고 있다”고 꼬집었다. 반면 다른 초선 의원은 “윤 후보가 이날 이 대표를 놀러 간 사람 취급하며 ‘리프레시 하라’고 하는 등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