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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승진시험에 목맨다"…도망치는 경찰 키운 '압정' 조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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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모습. 연합뉴스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모습. 연합뉴스

“승진에 혈안이 돼 현장과 민생은 뒷전인 대한민국 경찰의 민낯이다.”
흉기 난동 현장 이탈, 스토킹 피해자 보호 실패 논란 등 경찰 치안시스템의 무능과 허점이 잇따라 지적되면서 경찰 안팎에서 나오는 목소리다. 치안·안전에 대한 직업윤리와 몰입도 대신 “승진 공부와 ‘빽’ 만들기에만 열중하는 조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다른 공무원보다 상급직 적은 ‘압정형’ 조직

경찰관들이 승진에 ‘목숨 거는’ 상황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 배경에 ‘압정형’ 조직 구조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 지 오래다. 상위 직급은 좁은 핀처럼 적고, 하위 직급은 압정의 넓은 머리 부분처럼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 계급체계는 과도하게 구분돼 있다.

서울 일선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경찰 간부 A씨는 “경찰 계급은 총 11단계다. 여타 공무원이 9단계인 것에 비해 많다. 상위 직급의 비율은 현저히 낮다”며 “승진이 힘드니 극심한 인사 적체를 겪고 연봉·연금 측면에서도 불이익을 받는다”고 말했다. “하위 직급의 불만이 큰 상황에서 직업적 사명감까지 요구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압정형 조직의 실상은 국회에서도 지적됐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서범수 국민의힘 의원실이 경찰청과 인사혁신처 등으로부터 지난해 공무원 인사 구조 자료를 받아 분석한 결과, 4급 이상의 상위 직급 비율은 경찰 공무원이 일반직 국가공무원의 10분의 1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직 국가공무원 17만2733명 중 행정·기술·관리운영직 14만1280명의 직급별 비율을 보니 4급 이상은 6.2%(8664명)였다. 반면 경찰은 12만7377명 중 4급에 해당하는 총경 이상이 0.6%(726명)였다. 서범수 의원은 “경찰의 계급별 인력 구조를 일반직 공무원 조직과 유사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 이미지. 연합뉴스

경찰 이미지. 연합뉴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학교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미국의 경찰 계급 단계는 5개로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이라며 “행정이나 결제를 도맡는 상급자보다 일선에서 도둑을 잡는 비간부가 훨씬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 경찰은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승진에 목매지 않는다”며 “본인 권한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많고 현장직에 대한 보상도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시험·심사 체계적이지만, ‘메리트 시스템’ 한계

압정형 구조는 ‘승진 방식의 부작용’으로 이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찰 하위직(순경~경감)은 근속 외에도 시험·심사·특진을 통해 승진한다. 필기시험과 심사가 주요 경로다. 경정(5급)부터는 오직 심사를 통해 승진한다. 체계적으로 정착된 ‘메리트 시스템’(실적제 또는 능률급제)은 외형상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조직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경찰관들은 입을 모은다.

경찰서 수사과장인 B씨는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업무 강도가 높아지고 ‘워라밸’이 지켜지기 어려운 수사 부서를 기피하게 됐다”며 “승진 시험을 준비한다는 한 직원은 면담 때 ‘타 부서에 보내주지 않으면 휴직계를 내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수사 실적보다는 시험 성적을 택하는 게 승진을 위해서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한 30대 경찰관은 “시험의 장점도 있다”며 “상급자 눈치를 볼 필요 없고 공정하면서도 형법·형사소송법을 공부해두면 때론 현장에서 도움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시험은 Pass or Fail 식으로 자격만 갖추는 구조가 돼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유능한 직원들이 업무의 전문성보다는 시험공부에 매몰되는 게 조직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경찰 로고. 연합뉴스

경찰 로고. 연합뉴스

시험 아니면 빽…정치권 줄대기 불가피

“심사는 실력보다 빽이 좌지우지한다”는 말도 경찰 내부에서는 당연시하는 분위기다. 총경급 경찰관은 “13만여 명에 달하는 거대 조직에서 누가 일을 잘하는지 ‘근평권자’(청장)가 어떻게 일일이 알겠나”라고 말했다. 이어 “일단 승진되는 자리에 가야 승진을 기대할 수 있고, 그러려면 정치권에 ‘줄’을 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계급정년이 적용되기 시작하는 경정부터는 퇴직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경정 승진 14년 뒤에 총경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40대 후반에 직업을 잃게 될 수도 있다. 40대의 경정급 경찰관은 “경정 10명 중 2명 정도만 총경을 다는 데다 계급정년이 있으니 가장으로서 부담감이 크다”고 토로했다. 그는 “상급자한테 찍히거나 빽이 없으면 ‘옷 벗고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일은 징계 안 받을 정도만 하고, 윗사람한테 잘 보이는 게 전부’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경찰의 안테나, 정치 아닌 시민 향해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모습. 연합뉴스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모습. 연합뉴스

10여년 전 조현오 전 서울경찰청장은 “매달 업무성과를 누적평가해 승진 인사에 반영하고 승진대상자를 2~3배로 추려 경찰 내부인터넷망에 공개해 외부 청탁이 무의미하게 만들겠다”면서 인사 실험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변화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찰은 정치인에게 청탁하고 정치인은 필요할 때 경찰을 이용할 수 있으니 악어와 악어새 관계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경찰 조직의 역사적 패러다임을 보면 정치시대→개혁시대→시민지향시대로 변천한다”며 “우리나라의 경우엔 외향은 시민지향이지만, 알맹이는 정치시대에 머물러 있는 이중구조를 띤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찰의 안테나가 근본적으로 시민이 아니라 정치권을 향해 있어 ‘인천 흉기 난동’이나 ‘스토킹 살해’ 등을 막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경찰 승진 시스템의 맹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고 그런 시점에 이르렀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윤호 교수는 “경찰의 고과는 상급자의 주관적 평가에 따라 결정돼 공정한 인사라고 볼 수 없다”며 “함께 일하는 동료와 치안 서비스를 받는 시민 등 평가 주체를 다각화해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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