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차단한 그놈에게서 쏟아지는 전화…스토킹 처벌은 어렵다?

중앙일보

입력 2021.11.26 17:40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지 35일이 흘렀지만, 여전히 스토킹범죄는 잇따라 강력범죄로 비화되고 있다. 중앙포토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지 35일이 흘렀지만, 여전히 스토킹범죄는 잇따라 강력범죄로 비화되고 있다. 중앙포토

“수신차단을 한 상태라면 연락을 못 받은 거니까 스토킹 행위로 보기 힘들죠”
 최근 스토킹 범죄에 시달려 경찰 신고에 나선 A씨는 이 같은 답변을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연락처 수신을 차단한 남성으로부터 끊임없이 문자, 전화가 쏟아지자 두려운 마음에 경찰 신고를 마음먹었다. 그런데 경찰은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되기 이전의 판례를 들어 신고하더라도 처벌이 어렵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수신 차단한 상태라면 문자와 전화가 상대에게 닿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일부 휴대전화 기종의 경우, 전화번호를 차단하더라도 통화 수와 문자 내용이 그대로 기록에 남아 연락이 지속해서 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2년 만에 세상을 나온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스토킹 범죄는 강력범죄로 비화하고 있다. 일선 경찰서는 혼란에 빠졌다. 스토킹 신고는 급증하는데 처벌법에 대한 판례는 쌓이지 않아 예외의 상황 판단이 어려워서다. A씨의 사례와 관련해 경찰서 5곳에 자문했지만, 제각기 다른 기준을 들어 “처벌이 어렵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공통으로 “판례가 쌓여야 기준이 만들어지는데, 정착 초기라 이런 예외적인 경우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문자·전화가 피해자에 ‘도달’ 여부 따진다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피해로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던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모씨(35)가 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뉴스1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피해로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던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모씨(35)가 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수신 차단된 전화ㆍ문자를 스토킹 행위로 볼 수 있을까. 가장 큰 쟁점은 연락이 피해자에게 '도달'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법은 우편·전화·정보통신망 등을 이용해 물건이나 글·영상 등을 ‘도달하게 해’ 상대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스토킹 행위라고 규정한다. 또 이 연락이 지속적, 반복적으로 이뤄져야 스토킹 범죄로 간주한다.

경찰은 수신차단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스토킹 행위가 피해자에게 ‘도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해석한다. 경찰 관계자는 “본인 전화가 수신차단이 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휴대전화를 바꿔서 여성에게 지속해서 연락한 경우엔 스토킹 처벌법을 통해 처리가 가능하다"며 "하지만 수신차단이 됐다면 피해자가 직접 연락을 받은 게 아니라고 보고, 공포심과 두려움을 느꼈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수신차단 이외의 또 다른 정황이 있다면 맥락을 파악해 가중처벌의 요인 중 하나로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법 "스팸함에 차단 문자 있으면 도달" 

일부 휴대전화 기종은 휴대전화 번호를 차단하더라도 부재중 목록과 문자메세지 내역이 남아있어 내용 확인이 가능하다. 사진은 전화번호를 차단했을 경우 당사자에게 보이는 부재중표시. 최연수기자

일부 휴대전화 기종은 휴대전화 번호를 차단하더라도 부재중 목록과 문자메세지 내역이 남아있어 내용 확인이 가능하다. 사진은 전화번호를 차단했을 경우 당사자에게 보이는 부재중표시. 최연수기자

 휴대전화의 ‘스팸함’에 차단된 문자들이 있을 경우 처벌된 사례는 있다. 2018년 대법원은 고소인의 휴대전화 스팸함에 수신 차단된 문자메시지 기록이 남아있을 경우, 내용이 피해자에게 도달했다고 보고 이를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처벌했다.

대법원은 “문자가 스팸 보관함에 저장되어 있더라도 피해자가 문자 메시지들을 바로 확인해 인식할 수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도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봤다.

“기록 남겨라”…증거 모으려다 위험 노출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제대로 된 처벌을 위해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수신 차단하지 말고 전화를 받아 녹음하라는 등의 '기록 남기기' 조언들이 쏟아진다. 증거물 확보를 위해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피해자가 증거를 모으기 위해 직접 피해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몬다.

전문가들은 스토킹 처벌법안이 정착되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박찬성 변호사(포항공대 인권자문위원)는 “미수범 처벌규정을 두고 있지 않은 현행 스토킹 처벌법상 수신 차단해 전화 연락이 오지 않은 상태라면 스토킹 범죄로 처벌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미수범 처벌규정을 두면 처벌 대상의 행위가 지나치게 넓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찰서에서는 판례가 아직 쌓이지 않아서 판단 내리기 힘들어하는 상황”이라며 “최종적으로는 법원의 판례 군이 형성되는 것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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