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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주호의 퍼스펙티브

정부 주도 이제 안 통해…민간의 정책 참여 넓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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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효기간 지난 밀실정책

이주호 케이정책플랫폼 이사장, 아시아교육협회 이사장,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이주호 케이정책플랫폼 이사장, 아시아교육협회 이사장,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세계는 요동치고 미래의 불확실성은 증폭되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 기후 변화에 따른 위기, 변종 바이러스 확산 등 대한민국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도전에 직면하여 대내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정치인들의 여론몰이, 혹은 지식인들의 말싸움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여 현상을 바라보고 진실을 담은 좋은 정책에 목말라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정책 당국이 아무리 좋은 의도 혹은 선의를 가지고 추진한 정책도 잘못된 디자인과 잘못된 집행으로 재앙 같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래서 대선 후보들의 장밋빛 공약들도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대선 캠프 중심의 정책은 현실과 어긋나기 쉬워
정부출연연구소 독립성 높여 건설적 비판 활발해져야
외국에선 시민사회·학계도 정책 입안에 왕성하게 참여
정부 규제 사라져야 4차혁명 이끄는 혁신생태계 가능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 정책을 디자인하고, 집행하고, 평가해서는 산적한 정책 과제들을 결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포퓰리즘에 좌우되거나 경직된 이념에 사로잡히거나 관료 혹은 이익집단에 포획되는 낡은 정책 관행을 과감하게 혁파햐야 한다.

특히 대선 캠프와 청와대 위주의 밀실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장에 밀착하여 현장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동시에 전문가들의 아이디어와 연구를 폭넓게 반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장 밀착적이고 증거 기반 혹은 연구 기반의 창의적이고 포용적인 정책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교육부의 대학 규제개혁은 어불성설

이주호의 퍼스펙티브

이주호의 퍼스펙티브

구체적으로 좋은 정책을 지속해서 디자인하고 집행하며 평가할 수 있는 건강한 정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하여 세 가지 방향의 변화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좋은 정책을 실현하려면 우선 정부 개혁부터 하여야 한다. 역대 정부가 규제 개혁을 공약하고 국정 과제의 우선순위에 두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대학에 대한 교육부의 규제가 좋은 사례다. 대학이 교육부의 산하로 있는 한 근본적인 규제 개혁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학의 기능은 교육 기능에서부터 연구개발 기능이 추가되고 최근 들어서는 혁신 생태계의 허브 역할까지 더해지고 있다. 그 기능이 계속 확대되는 추세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주도하는 세계적 대학 중에서 우리처럼 교육부의 산하에서 규제와 통제를 받는 대학은 없다.

대학은 빠르게 신기술을 창출하거나 받아들여서 다양한 산업과 사회 분야에 접목해서 새로운 비즈니스와 사회 혁신의 모델, 나아가 새로운 산업을 창조하는 중심지가 되고 있다. 대학이 이렇게 변화할 수 있어야 청년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혁신가 혹은 창업가로서 신기술을 활용하여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내고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의 이러한 기능과 역할의 확대가 교육부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순간 바로 교육부로부터 철퇴를 맞게 된다. 따라서 대학을 교육부의 산하로부터 떼어내어 총리실로 편재하는 정부 개혁이야말로 대학 규제 개혁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대학을 교육부 산하에 그대로 두고 교육부가 주도하는 대학 규제 개혁은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꼴이다.

영국은 산업 규제 개혁을 위하여 산업 부처를 규제 개혁 부처로 탈바꿈시키는 기업규제개혁부(BERR)를 설치하는 정부 개혁을 단행했다. 2009년 여기에 다시 혁신 및 대학 지원 기능까지 통합하여 기업혁신기술부(BIS)를 설치하여 영국의 혁신생태계 조성에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권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출연연

둘째, 정부 정책을 디자인하고 평가하는 싱크탱크들이 정부 부처의 정책에 대하여 수시로 건설적인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하며 5년 정권의 한계를 극복하는 중장기 정책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정부 싱크탱크들은 정권의 강한 통제로 인하여 건설적 비판 기능이 매우 취약하며 5년 임기의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권의 입맛에 맞추어 정책이 손바닥 뒤집듯 일관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5년 정권을 넘어서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특히 백년대계로 불리는 교육정책과 같이 10년 혹은 20년 미래를 보고 전략적으로 추진하여야 하는 중장기 정책들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 싱크탱크의 핵심인 경제·인문·사회 정부 출연 연구소 중에서 청와대 혹은 정부 부처로부터 최대한 독립적으로 장기적이고 전략적 연구에 집중하는 연구원들이 있어야 한다. 현재 24개 경제·인문·사회 출연연들은 모두 총리실로 편제돼 있지만, 개별 정부 부처로부터 받는 재정 지원으로 인하여 결국은 정부 부처와 청와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따라서 경제·인문·사회 출연연 중에서 일부를 통합하여 대형 연구소로 만들어서 대통령 직속의 헌법 기구인 국민경제자문회의나 최근 법제화된 국가교육위원회 등으로 편제하고 재정도 담당하도록 하여 청와대 혹은 정부 부처와 독립적으로 건설적인 비판 기능도 수행하고 정권을 넘어서는 장기적인 과제에 주력하도록 하여야 한다.

기부자와 혁신가 연결한 싱가포르

셋째, 좋은 정책이 나오려면 정부 부처와 싱크탱크 개혁을 넘어서서 민간·시민사회·학계 등에서도 좋은 정책의 디자인과 집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혁신생태계를 구축하여야 한다. 필자가 지난주 참여하였던 싱가포르 테마섹 재단이 주체한 PAS(Philanthropy Asia Summit)가 좋은 사례다. 싱가포르가 세계의 난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혁신가들을 초대하여 아시아의 기부 단체와 연결해주는 행사였다. 이처럼 시민사회에서 단순히 기부만 하지 않고 교육·환경·보건 등 사회 분야에서 인적 역량을 키워주거나 혁신적인 사업에 리스크를 덜어주는 투자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글로벌 혁신가와 기부자들까지 참여하도록 하여 영향력을 세계로 넓혀가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이처럼 정부보다 시민사회가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최근에는 기업에서도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을 통하여 사회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목표로 하는 사회의 변화를 위하여 정부가 바로 나서기 전에 민간·시민사회·학계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혁신생태계를 구축하는 노력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난제의 해결에 앞장서는 한국의 민간 싱크탱크를 만들자. 그동안 브루킹스연구소와 같이 미국 워싱턴DC 지역의 많은 민간 싱크탱크들이 글로벌 정책 담론을 주도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을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인 호미 카라스는 세 가지로 요약한다.

정부·재단에서 독립한 미국의 싱크탱크

첫째, 미국의 민간 싱크탱크들은 학계·언론·정부 등이 할 수 없는 시의적절하고 현실적인 정책을 디자인하고 제안할 수 있다. 학계는 지나치게 이론적일 수 있고, 언론은 논쟁을 더욱 부추길 수 있으며, 정부는 정치적 편의성 혹은 제도적 제약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민간 싱크탱크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의 민간 싱크탱크는 정부와 민간의 이익으로부터 독립적이다. 이러한 독립성은 무엇보다도 재정을 정부가 아니라 기업·개인·재단 등 민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민간으로부터 조달하는 재원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기부자가 정책 내용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는 등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준수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와 사적 이익으로부터 자유롭게 정책을 비판하고 제안할 수 있다.

셋째, 사회에 주는 임팩트가 극대화되도록 정책을 디자인하고 제안할 수 있다. 같은 의견과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정치적 편향을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계·언론·정부·시민사회 등과의 다양한 파트너십을 통하여 균형 잡힌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회에 주는 긍정적인 임팩트를 극대화할 수 있다.

한국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역량이 세계 10위권으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인류가 직면한 글로벌 도전들은 대한민국의 스마트 솔루션을 기대한다. 이제 국내 문제를 협소한 시각에서 정파적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세계시민의 입장에서 세계와 함께 글로벌 난제를 해결하는 세계 최고의 한국 민간 싱크탱크를 만들어보자. 지정학적인 국익에 집착하는 패권 국가 혹은 노쇠한 국가들과 달리 대한민국은 첨단 기술과 세계적 콘텐트를 가지고 지구촌 난제를 스마트하게 해결하여 세계 시민에게 혜택을 주는 세계 최고의 스마트파워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