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최훈 칼럼

결국은 ‘살림살이’ 아닌가요 후보님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편집인

최훈 편집인

동서고금 대선에서 가장 강력한 효과를 미쳤던 구호는 뭘까. 국내에선 “못살겠다 갈아 보자”인 듯싶다. 1956년 자유당 이승만·이기붕 조에 맞선 민주당 신익희·장면 팀의 걸작이었다. 밀리던 자유당의 대응이 “갈아 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었을 정도니. 미국에선 1980년 민주당의 현직 카터 대통령에게 도전한 레이건 공화당 후보의 유세였다. “누구를 뽑을지에 앞서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은 지금 4년 전보다 더 잘살고 있습니까.” 정통보수 레이건의 작품을 활용한 국내 정치인은 의외로 2002년 대선의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였다.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1992년 현직인 부시에게 맞선 클린턴이 되뇌었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Stupid! It’s the economy)”도 역대급 성공작. 걸프전 승리의 영웅인 부시가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다 초래한 경기 부진을 파고든 승부수였다. 노회찬 전 민노당 의원이 2004년 총선 직전 “같은 불판에 50년간 삼겹살 구우면 시컴해진다. 판을 통째로 갈자”고 한 비유도 서민적 공감을 불렀다. 민노당은 10석의 첫 등원으로 도약했다.

네거티브 증오 마케팅 득세하며
경제 빅 이슈의 논쟁은 드문 대선
세금·재정·성장의 미래 기조 놓고
끝장토론과 국민 설득 노력 절실

성공의 공통점은 ‘살림살이’였다. 먹고사는 문제, 경제다. 기존 권력의 성과에 대한 야권의 회고적 비판과 도전, 약자 도와주기 심리가 유권자를 흡인하기엔 좀 더 유리했던 심리적 지형도 발견된다. 우리 대선에선 그러나 이상하게도 경제가 승부를 가를 빅 이슈로 부각된 사례가 별로 없었다. 나라가 부도난 1997년 대선에서조차(심리적 영향은 있었겠으나) 김대중의 최종 승리는 DJP연합, 이인제의 이회창 표 잠식 등 정치 구도가 더 큰 요인으로 해석됐다.

이번 대선 역시 재난지원금, 종부세 등으로 티격태격은 하고 있으나 대세를 좌우할 변수로 부상하지는 못한 형국. 세 가지 이유쯤이 있겠다. 내년 대선 역시 ‘괴물 코로나’의 영향 아래인 때문이다. 성장률, 실업률, 인플레이션·물가, 경기 등 정통적인 대선의 경제 변수가 원론 그대로 작용하기 쉽지 않은 미증유의 위기다. 정치권력이 사회를 극단의 진영으로 나눠놓아 네거티브 증오 마케팅 만이 득세한 것은 최악의 요인이다.

시대의 변화도 녹아들었다. “No food one problem, Much food many problems”이라는 얘기대로 세계 10위권 규모의 경제 해법 압축이란 복잡다기하기만 하다. 계층·세대가 개인화·파편화되며 행복, 삶의 밸런스 등의 가치와 이해에 따라 안 그래도 어렵고 지루한 경제를 선택적으로 수용할 뿐이다. 표에 목마른 후보들이 인내심과 내핍을 요구해야 할 미래지향, 보편적 정책을 설득하기란 갈수록 난감해진다.

답답한 우리의 대선. 하지만 몇 가지 경제 이슈가 최전선의 쟁점으로 진화할 가능성만은 감지된다. “죽음만큼 피할 수 없다”는 세금이기에 감세·증세 논쟁을 한번 그려보고 싶다. 증세든, 감세든 최종 목표는 “더욱 세금을 많이 모아 공동체를 위해 풍족하게 쓰자”는 것일 수  있다. 감세로 실질소득과 소비·투자, 일자리를 늘려가면 결국 세금을 더 모을 수 있다는 가설의 논쟁이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최대 1%, 30조원 규모의 국토보유세를 신설, 기본소득 등의 재원에 쓴다고 한다. 불로소득 근절, 불평등 완화와 분배라는 진보적 색채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보유세(종부세·재산세)와 양도소득세 인하 등 보수적 특성인 감세로 맞선다. 이 충돌의 지점에서 발생할 부자 감세, 기업의 공장 해외 이전, 재산세와 부동산의 이중과세, 글로벌 스탠더드 등을 둘러싼 논박이 활발해지길 기대해 본다.

균형재정도 승부처여야 한다. “곳간에 재정 쌓아두면 썩어버린다”는 청와대 대변인의 용감한 충성 발언이 “재난 지원”으로 희석됐지만 재정의 건전성은 나라의 산소포화도에 다름 아니다. GDP 채무비율(IMF 기준)이 올해 51.3%, 2026년 66.7%에다 ‘선진국 중 증가 속도 1위’라는 예측은 나라 사활의 최우선 고민거리다. “공짜 점심은 없다(No Free Lunch)” “지속 가능한 장기 계획(the Long Run)”이 우선인 보수와 복지·재분배를 통한 불평등 완화의 큰 정부 진보 간의 밤샘토론이야 국민에 대한 예의이자 의무다. “후대 청년들을 위해 곳간에 쟁여놓아야 할 것”을 둘러싼 경제적·도덕적 성찰이야말로 후보들 모두에게 응답받아야 마땅하다.

미래의 ‘성장’ 개념은 또 어떤가. 이 후보는 ‘전환적 공정 성장’의 깃발을 들었다. 디지털·재생에너지의 대전환으로 국부를 늘리되 공정경쟁 질서를 결합, 우상향 성장하자는 주장이다. 정부 개입, 확장 재정은 불가피해 보인다. 윤 후보의 약속은 민간, 기업이 중심이 되고 정부가 규제혁파, AI 등 4차 산업혁명에의 집중 지원으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성장 생태계다. “시장이 만능은 아니다”라지만 국가 주도엔 선을 긋고 있다.

21세기 들어 우리는 두 번씩의 진보·보수 대통령을 겪었다. 실험과 아우성만 거듭해 왔던 대한민국의 경제 기조였다. 이번만큼은 작심토론으로 미래 해법을 찾아가려는 선거의 진화를 보여 달라. 국민들 잘 먹고, 잘살고, 각자의 가치로 행복하게 해 주는 대통령 좀 뽑게 해 달라. 결국은 ‘살림살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