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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에만 왕릉 40기…세계유산 명예냐, 주거권이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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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장릉(사적 제202호)에서 보이는 인천 검단신도시 아파트 공사 현장. 지난 9월에 촬영한 사진이다. 심석용 기자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장릉(사적 제202호)에서 보이는 인천 검단신도시 아파트 공사 현장. 지난 9월에 촬영한 사진이다. 심석용 기자

“입주자들의 간절한 마음을 당연히 알죠. 그곳에 소위 돈 많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입주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만 법은 지키는 것이니 좋은 해결책을 찾아야 할 텐데,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네요.”

17일 수화기 너머로 문화재위원회 A 위원의 긴 한숨이 들렸다.

김포 장릉의 경관을 가린다고 해서 일명 ‘왕릉뷰 아파트’로 불리는 인천 검단 신도시 아파트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 지 4개월째. 내년 6~9월 입주 예정이지만, 문화재청이나 건설사 측이나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논란이 된 ‘왕릉뷰 아파트’는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에 건설 중인 3개 아파트 단지 19개 동(1400여 가구)이다.

김포 장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경계 500m까지 문화재 구역으로 설정돼 있어 현행법상 이 범위 안에서 높이 20m 이상의 건물을 지으려면 문화재청 심의를 사전에 받아야 한다. 해당 아파트 단지는 각각 213m, 375m, 395m 떨어져 있지만,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미 지상에서 93~97m 최대 20층까지 골조 공사를 마쳤다.

3개 건설사 측은 ‘2017년 인천도시공사로부터 이 땅을 매입할 때나 2019년 착공했을 때 이런 고지를 받지 못했다’지만 문화재위원회 입장은 다르다. 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2017년 관련 법령이 만들어진 뒤 건설사들이 이를 체크하지 않고 공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건설사 법무팀에서 반드시 확인해야 했던 문제인데 억울함을 호소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일축했다.

문화재청 명령으로 공사가 중단된 검단신도시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이 지난 14일 건설사 간담회에서 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뉴스1]

문화재청 명령으로 공사가 중단된 검단신도시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이 지난 14일 건설사 간담회에서 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뉴스1]

문화재청은 7월 3개 아파트 19개 동에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고, 건설사들이 명령 취소 소송 및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서울행정법원은 12개 동의 공사를 중지하라며 문화재청의 손을 들어줬다. 건설사 측은 건물 높이는 유지하되 외벽 색상과 마감 재질 등을 바꾸겠다고 개선안을 냈지만, 문화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이를 심의한 뒤 ‘보류’ 결정을 내렸다.

지난달 국정감사 당시 이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나무를 심어 아파트를 가리게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실이 공개한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측의 용역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아파트를 가리기 위해선 30m~58m 높이 나무가 필요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58m짜리 나무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도 않고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침엽수 중 45m짜리가 있지만 200년 정도 기른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죽은 조선의 왕, 그것도 정식 국왕도 아니었던 왕의 무덤 때문에 이미 지은 아파트를 허무는 것이 말이 되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측은 장릉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장릉이 문화재인 만큼 규정을 지키는 게 당연하다”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문제를 들었다. 2009년 조선왕릉 40기가 패키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이 중 하나라도 관리 감독이 부실해질 경우는 남은 39기까지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문화재위원회의 한 위원은 “최근 3기 신도시 개발 등이 수도권 주택공급량이 확대되는 상황인데, 장릉이 나쁜 선례가 되면 곤란하다는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왕릉 40기는 모두 수도권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으로 얻는 혜택은 무엇일까. 문화재청 세계유산정책과 여성희 과장은 “국민과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이 올라가고, 관광자원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효과를 누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금전적 혜택은 없지만, 일종의 ‘명예’를 얻는 셈이다.

실제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남한산성의 경우 이듬해인 2015년 방문객이 35만9407명으로 전년도(32만1838명)보다 약 10%가량 증가했다. 하지만 2016년에는 14만5287명, 2017년에는 21만7013명으로 감소해 관광 효과가 일정하진 않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한국의 지정 세계유산은 ‘종묘(1995년)’ ‘석굴암·불국사(1995년)’ ‘수원화성(1997년)’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한국의 서원(2019년)’ 등 총 14점이다.

서울 덕수궁이나 창경궁 등의 예를 들면서 거리 500m까지 막는 것은 ‘역차별’이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건축공학과 교수는 “솔직히 덕수궁이나 경복궁 앞에 고층 건물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궁 관람이 불편한 것은 아니지 않냐”며 “문화재도 소중하지만, 지금 사는 사람들의 주거권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강동진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문화재 보존 반경이 지역마다 달라 서울은 문화재로부터 100m, 경기는 500m이다. 또 법령이 최근 정비됐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국정감사에서 김포 장릉 아파트 문제를 지적한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과 해당 지역구의 신동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는 입주 예정자와 일반인들의 상반된 항의 전화가 매일 빗발치고 있다고 한다. 신 의원 측은 “지역구라고 주민들 편들지 말고 빨리 허물라는 전화가 쏟아져 업무가 어려울 지경”이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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