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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태 “탱크처럼 금메달 가는 길 뚫겠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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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한국 유도의 ‘소방수’로 투입된 황희태 남자 대표팀 감독. 강한 체력과 변칙 기술을 앞세워 한국 유도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김민규 기자

한국 유도의 ‘소방수’로 투입된 황희태 남자 대표팀 감독. 강한 체력과 변칙 기술을 앞세워 한국 유도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김민규 기자

한국 유도는 침체기다. 올해 도쿄올림픽에서 노 골드(은 1·동 2)에 그쳤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45년 만에 가장 저조한 성적이다. 1984년 LA 대회에서 금 2·은 2·동 1개를 따내며 효자 종목이 된 한국 유도는 2000년 시드니 대회(은 2·동 3)를 제외하고 2012년 런던 대회까지 모두 금맥을 캤다. 그러나 2016년 리우 대회에서 세계 1위 4명을 앞세우고도 은 2·동 1에 머무르며 내리막을 걸었다.

성적만 나빠진 게 아니다. 한국 특유의 ‘체력 유도’가 실종됐다는 지적이다. 체력은 유럽의 강한 힘과 유도 종주국 일본의 정밀한 기술에 맞서는 한국의 경쟁력이었다.

대한유도회는 지난 10일 위기의 한국 유도를 구할 새 사령탑을 발표했다. 선수 시절 어떤 상대를 만나든 바닥에 눕혀서 ‘탱크’로 불렸던 황희태(43) 감독이 남자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최근 서울 서소문에서 만난 황 감독은 “모든 지도자의 꿈인 대표팀 감독을 맡게 돼 기쁘다. 동시에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낀다. 유도 강국의 면모를 되찾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황희태 감독은 2000년대 한국 중량급 유도의 간판이었다. 25세였던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 90㎏급 금메달을 따내며 국제무대에 혜성같이 등장한 그는 세계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아시안게임에서도 두 차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90㎏급에서 우승한 그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선 100㎏급 정상에 섰다. 은퇴 후엔 대표팀 코치, 전력분석관, 트레이너 등을 거쳤다.

황희태 감독은 키 1m75㎝로 1m90㎝대 거구들이 즐비한 중량급에선 단신에 속한다. 체구가 작으면 공격 반경이 짧고 힘도 부친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괴물 같은 힘으로 불리한 신체조건을 극복했다. 그는 국가대표 시절 웨이트트레이닝장에 가장 먼저 나와서 가장 늦게 떠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황희태 감독은 “유도에서 자신감은 체력에서 나온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어도 시도할 힘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도쿄올림픽에선 한국 선수들의 체력 열세가 아쉬웠는데, 끊임없이 공격하는 한국 유도의 색깔을 되찾겠다.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기본인 체력부터 다지겠다”고 강조했다.

최근 두 차례 올림픽에서 남자팀을 이끈 감독은 모두 60대 노장(서정복·금호연 감독)이었다. 황희태 감독은 이들보다 스무 살 정도 젊다. 37세까지 선수로 뛰었던 그는 최신 기술을 전수할 수 있다. 그는 주특기인 양쪽 업어치기는 물론 어깨들어메치기나 배대뒤치기 같은 변칙 기술을 구사해 ‘매트의 팔색조’로도 불렸다.

황희태 감독은 “최근 한국 선수들은 업어치기 위주의 정석 공격을 한다. 하지만 업어치기가 통하지 않으면 변칙 공격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완전하지 않은 기술이라도 경기 후반 지친 상대에겐 치명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평소 인상이 차갑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선수 은퇴 직후인 2015년 무도 특별채용 경찰관으로 임용돼 강력계 형사로 2년간 근무한 이력 탓이다. 그는 “형사 출신이라고 차갑고 무뚝뚝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래 봬도 여자 대표팀 코치 출신이다. 상상이 안 되겠지만, 여자 후배들과 분식집에서 수다 떨고 밥 먹는 것을 좋아했다. 알고 보면 정 많고 따뜻한 남자다. 앞으로도 선수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소통하겠다”고 말했다.

각종 대회 금메달을 수집한 황희태 감독도 결승에 오르지 못한 무대가 있다. 바로 올림픽이다. 그는 2004년 아테네 대회와 2012년 런던 대회에 출전했지만, 모두 4강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올림픽 실패 경험은 지도자가 되는 데는 약이 됐다.

황희태 감독은 “첫 올림픽에선 금메달을 놓쳤다는 생각 때문에 패자부활전에서 포기한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두 번째 올림픽에선 젖 먹던 힘까지 다해도 이루지 못했다. 스타 선수였지만, 2등의 마음도 잘 안다. 이해하고 품어주는 리더십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선수 때 놓친 올림픽 금메달을 감독으로 이루고 싶다. 내 별명인 탱크처럼 항저우(아시안게임)를 거쳐 파리(올림픽) 금메달로 향하는 길을 뚫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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