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목숨까지 걸었다, 여진족이 백두산 인삼 캐러 다닌 이유 [역발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드라마 '킹덤-아신전'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아신전'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아니 이러다가 또 뭔 난리가 나는 거 아니에요, 형님?"
"사실인가 보네 그 소문 말이야."
"뭔 소문이요?"
"산삼을 탐해 폐사군 땅에 들어간 여진족들이 몰살을 당했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아신전'의 한 부분입니다.
폐사군은 세종 때 백두산 인근 여연(閭延)·우예(虞芮)·무창(茂昌)·자성(慈城) 일대에 설치했다가 방비 등의 어려움으로 세조 때 폐지한 지역입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담비가죽, 산삼 등이 많이 났기 때문에 일대에 거주하는 여진족이나 조선인들이 수렵·채취를 위해 드나들었고, 이는 조선과 여진 양 세력 사이에 갈등의 요인이 되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진족은 왜 인삼을 이토록 탐했을까요.

인삼 [사진 중앙포토]

인삼 [사진 중앙포토]

인삼은 조선만의 특산품이었을까

"이 지역에서 조선인 월경자들이 인삼을 캐는 일은 내가 아는 것이 이 정도일 뿐이니 내가 모르는 것까지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귀국은 옛날의 맹약을 저버리고 몰래 우리 땅에 들어와 수렵하고 인삼을 캐어가고 있습니다. 귀국의 땅에 비록 담비가 많아도 우리가 한 번이라도 경계를 넘어간 적 있습니까"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633년 후금(청)의 칸 홍타이지는 조선 국왕 인조에게 이러한 내용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압록강을 넘어 만주에서 인삼을 캐는 조선인에 대해 항의한 것이죠.

한국에서는 인삼이 고려-조선만의 특산품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는 다릅니다. 북위 30~48도 사이에서 자라는 인삼은 백두산, 길림성, 흑룡강 일대, 러시아 연해주 인근 및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됩니다.
한국은 신라 시대부터 인삼을 중국에 수출했지만, 고려 시대 만주를 차지했던 거란(요), 여진(금) 등의 세력도 인삼을 채취해 중요한 상품으로 거래했습니다.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문제가 복잡해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 여진족이 누르하치에 의해 후금으로 통일되면서입니다.
사실 이전까지 백두산은 물론 만주 일대는 조선인, 여진족, 한(漢)인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며 인삼을 채취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주에 후금이라는 나라가 들어서자 누르하치는 강력하게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생 국가를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누르하치는 인삼의 가치를 주목한 것이죠.

하필 이 무렵부터 명나라에서도 인삼의 가치가 크게 올라갑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됐던 명나라 군대에 의해 그 의학적 효용 등이 전해졌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인삼은 후금이 명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는 중요한 물자였습니다. 이들은 인삼을 팔아 짭짤한 이익을 남겼고, 이는 후금이 국가 수입에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 사실상 중국 시장에서는 후금 인삼과 조선 인삼이 팔리고 있었고, 일종의 경쟁 관계였던 셈입니다.

병자호란 전시회

병자호란 전시회

후금이 인삼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는 누르하치의 성장 일화에서도 엿보입니다. 누르하치는 계모 슬하에서 학대받다가 집을 떠나 백두산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인삼을 채취해 교역했고, 이를 통해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키우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전해집니다.

누르하치의 행적을 담은 『태조고황제실록(太祖古皇帝實錄)』에 따르면 새로운 인삼 보관법을 개발한 것도 누르하치입니다. 그는 인삼을 쪄서 말리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를 증포법(蒸包法)으로 발전시켜서 여진족들이 명과의 인삼 무역에서 좋은 가격을 받게 도왔다고 합니다. 누르하치 자신도 "진주, 인삼, 담비 가죽 등 진귀한 물건을 중국과 교역한 덕분에 나라와 백성이 부유해졌다"고 만족스러워했습니다.

그러니 만주와 백두산 일대의 국경 문제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인삼을 찾아다니는 여진족과 조선인들은 수시로 상대 국경을 넘었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명나라에서 인삼의 가치가 올라가고 후금도 국가상품으로 다루면서 민감해진 것이죠

병자호란 굴욕비

병자호란 굴욕비

대항해시대·인삼·소빙기 
"앞서 인삼 가격을 16냥으로 정했으나 귀국이 '인삼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니 9냥만 지급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하니 이전의 맹약을 배반하고 이를 핑계로 가격을 낮추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귀국은 인삼을 사용하지 않는다지만 매년 당신들이 경계를 벗어나 우리 강토로 들어와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 쓸모없는 인삼을 캐가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위에서 소개한 1633년 홍타이지의 서한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당시 후금은 조선에 인삼을 수출했는데, 조선에서 가격 인하를 요구하자 이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죠. '조선에서 인삼이 필요 없다면서 왜 만주로 들어와 캐가냐'고 항의하는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1600년대 초반만 해도 후금은 굳이 조선에 인삼을 팔 필요가 없었습니다. 때마침 대항해시대가 개막됐고,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과 차는 주요한 상품이 됐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유럽과 일본의 은이 중국으로 빨려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은의 상당수는 만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명나라는 만주 지역의 안정을 위해 군사비로도 많은 은을 썼지만, 여진족을 달래기 위한 교역을 하면서 많은 은을 소비했습니다.

대항해시대의 교역로 [사진 중앙포토]

대항해시대의 교역로 [사진 중앙포토]

문제는 후금이 강성해져 명나라에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면서 시작됩니다. 명나라와 거래를 할 수 없게 된 후금은 심각한 재정 파탄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여기에 17세기 동아시아에 소빙기가 시작되면서 농작물 작황도 직격탄을 맞게 됩니다. 안 그래도 농업기술이 부진한 만주 여진족들은 이중삼중으로 위기를 맞게 된 셈입니다. 이제 막 건국한 신생국가 후금으로선 생존의 위기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후금은 돈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조선에 인삼 등을 강매합니다. 조선도 인삼이 귀하긴 했지만, 굳이 후금으로부터 수입할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다만 앞서 1627년 정묘호란으로 크게 당한 적이 있으니 후금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는 게 조선의 입장이었던 것이죠.

인삼을 둘러싼 청-조선의 갈등
사실 홍타이지가 '우리가 언제 너희들의 영역에 들어간 적이 있느냐'고 항의한 것은 사실과는 조금 다릅니다.

16세기에는 여진족이 인삼을 채취하기 위해 조선 경내로 들어와 강계 일대가 무인지경에 이르고 인삼을 캐던 여진족들이 조선의 정탐병을 보고 칼을 뽑아들며 대항하는 등 혼란이 크다는 지적이 『중종실록』과 『명종실록』에도 등장합니다.
다만 조선에 들어온 여진족을 참수하거나 가죽을 벗기는 등 그 처리가 지나치게 가혹해 조선 내에서도 문제가 됐습니다.

"변방의 조선인들이 야인을 가벼이 보고 공을 얻으려고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인삼을 캐고 있는 야인들을 다수 붙잡아 죽여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중종실록』 24년 11월 22일)

임진왜란 중에는 누르하치가 이런 가혹한 처우 문제를 정식으로 항의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드라마 '킹덤-아신전'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아신전'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어쨌든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하자 이런 관계는 바뀌게 됩니다. 청나라 통치자들은 백두산을 자신들의 세력 발상지인 용흥지지(龍興之地)로 규정했고, 백두산 일대에서 산출되는 인삼 등 특산물 독점을 위해 봉금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만주로 넘어가는 조선인 문제가 양국 문제로 부각됩니다.

양국 정부의 입장이 어떻든 간에 백두산 일대에 사는 사람들에겐 인삼은 생업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고, 인삼을 구하기 위한 위험한 국경 넘기는 계속됐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청나라의 봉금정책으로 이곳을 찾는 중국인들이 줄어들자, 조선인의 입장에선 유혹의 땅이 됐습니다.

1672년 월경자 처벌법을 제정했는데도 이같은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1704년에는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 청나라 사람 4명을 죽이고 인삼을 약탈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청나라에서는 배상금을 요구하는 한편 월경을 막지 못한 해당 지역 관원까지 처벌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백두산 천지. [연합뉴스]

백두산 천지. [연합뉴스]

"우의정 민암이 아뢰기를, '북도 어사(北道御史) 이우겸이 삼수(三水)에 가서 인삼을 캐는 자 30여 인을 잡아다 가두어 한 지경의 백성들이 전부 도망하여 피하므로 어쩔 수 없이 도로 석방하니 그제야 모두 되돌아와 일제히 호소했다 합니다. 이곳 백성들의 명맥은 단지 인삼을 캐는 데 달려 있어 인삼을 캐게 되면 살아가고 캐지 못하면 죽게 되는 것이므로, 국가에서 비록 이와 같이 금단하더라도 달리 생활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명년에도 또 가서 캐려고 할 것이니, 만약 금하는 법을 늦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삼수와 갑산은 반드시 모두 텅빈 땅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실로 잘 처리할 계책이 없습니다."  (『숙종실록』 19년 12월 26일)

『숙종실록』의 이같은 내용은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조선왕조실록 사진 [사진 문화재청]

조선왕조실록 사진 [사진 문화재청]

다만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조선 입장에서 반가운 것도 있었는데, 중국에 바치는 공물 리스트에서 인삼이 빠진 것입니다. 청나라는 조선에 금, 은, 담비가죽, 종이 등을 요구했지만, 인삼은 제외했습니다.
심지어 병자호란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홍타이지는 인삼 교역을 완전히 금지했고, 조선 국왕에게 선물로 인삼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여진족 또한 인삼을 자신들의 특산품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중국 대신 일본으로  
하지만 17세기에는 명나라 수출에 맞춰 인삼 재배가 확대되던 차였기에 청나라가 인삼 교역을 완전 중지시킨 것이 무조건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조선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인삼 시장을 잃은 셈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조선은 눈을 일본으로 돌립니다. 이때까지 인삼의 대일 무역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중국 시장을 잃은 만큼 일본 시장을 개척하기로 한 것이죠. 결국 왜관에서 인삼 교역이 허가됐고, 일본 수출량은 매해 큰 폭으로 증가했습니다. 조선 상인들은 인삼을 일본에 수출해 은을 받고, 그 은으로 중국에서 비단을 사와 국내와 일본에 유통시키며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부산의 초량왜관 [연합뉴스]

부산의 초량왜관 [연합뉴스]

당시 일본에는 임진왜란 이후 인삼이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동의보감』 같은 책도 건너가면서 인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때였습니다. 왕실과 귀족들은 물론 서민층까지 인삼을 찾는 수요가 늘어나자 일본은 18세기 초 '인삼대왕고은'이라는 특제은까지 주조합니다.
은이 너무나 많이 빠져나가자 일본은 순도를 낮춘 은을 만들어 이를 인삼 대금으로 결제했는데, 이때문에 이를 놓고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조선 상인들이 그런 저질 은을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한 것이죠. 당시 일본 내에 유통되던 은화는 순도가 30% 수준에 불과했는데 인삼대왕고은은 순도가 80%나 되었다고 하니 그만큼 인삼에 대한 의지가 강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인삼은 조선과 만주의 공통 상품이었고, 양국의 갈등에는 인삼에 대한 독점 욕망도 적지 않게 작용했습니다.
또한 국가 관계나 위정자들의 정책에 따라 그 일대에 거주하는 서민들의 생업은 크게 휘청거리고 때로는 목숨을 건 도박을 해야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기도 했습니다.
최근 요소수 사태를 비롯해 코로나19 이후 나타난 여러가지 상황을 살펴보면 역사는 늘 비슷한 줄거리가 반복하게 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됩니다.

※이 기사는 김선민 『인삼과 강역-후금·청의 강역인식과 대외관계의 변화』, 이용식 『17세기 조선 국경지역에서의 민의 유동 일고찰』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