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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사상은 중화문화의 정수” 中, 40년만의 ‘역사결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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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일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거행된 창당 100년 기념대회에서 연설을 마치고 중국공산당 만세를 외치며 손을 치켜올리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지난 7월 1일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거행된 창당 100년 기념대회에서 연설을 마치고 중국공산당 만세를 외치며 손을 치켜올리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중국공산당(중공)이 11일 40년 만에 새 역사 결의를 채택하고 시진핑(習近平·68) 당 총서기의 ‘시진핑 사상’을 중화 문화와 중국 정신의 정수라고 평가했다. 11일 폐막한 중공 19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6중전회)에서 논의한 결과를 정리한 공보에서다. 이로써 시진핑 주석은 내년 하반기에 열리는 20차 당 대회에서 세 번째 총서기 연임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확보했다.

이날 오후 관영 신화사는 나흘간 열린 6중전회의 공식 회의록 격인 7400여자의 공보를 타전했다. 공보는 전체 회의에서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결의’(역사 결의)를 심의 통과했다고 강조했다. 지난 1981년 두 번째 역사 결의 당시 “일치 통과”와 달리 ‘일치’ 두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중국중앙방송(CC-TV) 메인뉴스인 신원롄보(新聞聯播)는 결의안이 거수 통과되는 장면을 짧게 보도했다. ‘역사 결의’ 전문은 공보와 함께 발표되지 않았다.

대신 6중 전회 공보는 압도적인 시진핑의 위상을 보여줬다. 시진핑 이름은 총 17차례 등장, 마오쩌둥(毛澤東) 7차례, 덩샤오핑(鄧小平) 5차례를 크게 능가했다. 중공 문건에 등장하는 핵심 지도자의 이름 횟수는 당시 정치적 위상을 반영한다.

특히 2012년 집권 이후 시 주석이 재임한 9년간의 업적을 서술한 부분이 공보 전체의 40%가량을 차지했다. 공보는 “당 중앙은 전체 당과 군, 전국 각 민족 인민은 더욱 긴밀하게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 주위로 단결해,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전면 관철할 것을 호소한다”며 사상통일을 강조했다. 시진핑 주석은 5년 전 열린 18기 6중전회에서 당의 ‘핵심’ 지위를 차지하며 이듬해 19차 당 대회에서 이른바 ‘시진핑 사상’을 당 헌법에 올리는 기반을 닦은 바 있다.

공보에는 ‘역사의 주동 정신’, ‘역사성 변혁’ 등 시 주석을 향한 찬사가 가득했다. 공보는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 위대한 역사의 주동 정신, 거대한 정치적 용기, 강렬한 책임과 담당을 가지고 국내와 국제 대세를 총괄했다”며 “오랜 기간 해결하려 했지만 못했던 많은 난제를 해결하고, 과거에 이루지 못한 큰일을 이룩했으며, 당과 국가사업에 역사성 성취를 추동했고 역사성 변혁이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안치영 인천대 중국학술원 원장은 “6중 전회 공보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그 배후의 위기감이 특징”이라며 “결코 근본적 문제에서 결정적인 잘못을 해선 안 되며, 걱정하면 살아남고, 안주하면 죽는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공보는 “전체 당은 중국공산당이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 문제를 명심해야 한다”며 “푸른 산이 소나무를 꽉 물고 놓아주지 않듯 이미 정한 목표의 실현을 위해 집요하게 분발해야 한다”고 분발을 촉구했다. 공보가 지적한 ‘근본문제’에 대해 안 교수는 “사회주의 건설”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11일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박물관에서 한 방문객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 전시물을 촬영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11일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박물관에서 한 방문객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 전시물을 촬영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6중전회에서 시 주석은 덩샤오핑을 능가하는 당 장악력을 노렸다. 칼 민즈너 미국 외교관계위원회(CFR) 시니어 펠로는 이번 6중전회에 대해 “시 주석이 원하는 이미지가 마오·덩과 동급일지, 아니면 (덩을 제치고) 마오와 대등한 지위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민즈너 펠로는 “10일 9일자 인민일보 1면에 실린 기사 세 건에 시진핑 이름이 각각 77, 54, 32차례 실렸다”며 “이는 베이징 일당 체제가 1인 지배로 얼마나 더 악화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시 주석의 정치적 야심을 과거 마오의 구호에 빗댄 보도도 나왔다. 대만 중앙사는 “차오잉간메이(超英赶美·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추격한다)”라는 1950년대 대약진 표어에 빗대 “차오덩간마오(超鄧赶毛, 덩샤오핑을 따라잡고, 마오쩌둥을 추격한다)” 수준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시진핑은 이번 ‘역사 결의’로 만든 후광을 이용해 스스로 물러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혹은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재집권 기간을 결정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시 주석의 재집권이 3연임에 머물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대신 이번 ‘역사 결의’는 지난 두 차례와 달리 ‘과오’를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 결의안 명칭부터 잘못을 뜻하는 ‘문제’를 ‘성취’가 대신했다. 특히 문화혁명(문혁)을 포함한 마오쩌둥 치세를 놓고 “중국 인민은 구세계를 잘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신세계 건설을 잘했고,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고,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긍정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일 폐막한 중국 공산당 19기 6중전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CC-TV 촬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일 폐막한 중국 공산당 19기 6중전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CC-TV 촬영]

과거사 반성에 인색한 증거는 올해 발간된 『중국공산당 간사(簡史)』가 이미 암시됐다. 앞선 2001년 판 『간사』는 문화혁명 부분에서 “당내 개인의 독단과 개인숭배 현상이 점차 자라났다”, “마오쩌둥은 (문혁에) 주요한 책임을 진다”며 마오의 잘못을 명확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2021년 판에서는 “마오쩌둥은 자본주의 부활의 위험성을 크게 경계하면서 당과 정부에서 부패와 특권, 관료주의 등의 현상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탐색하고 투쟁했다”며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 발전 규율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아 이론과 실천에서 좌경 착오가 누적되었고, 최종적으로 내란을 야기했다(p.206)”며 마오를 최대한 변호했다.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시 주석은 집권 직후부터 역사를 정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했다”며 “대신 역사 허무주의를 앞세워 오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한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어 “강대국이 부상할 때는 지나온 과거 역사를 성취와 함께 잘못까지 균형감 있게 성찰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 장기 집권의 기반을 닦은 시 주석은 덩샤오핑 시대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과도한 빈부 격차를 초래한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을 더불어 모두 함께 부자가 되자는 ‘공동부유(共同富裕)’로 대체한 이유다. 20차 당 대회의 핵심 이슈가 될 ‘공동부유’에 대해서는 12일 열릴 6중전회 기자회견에서 한원슈(韓文秀) 중앙 재경판공실 부주임이 설명할 전망이다.

중국공산당 역대 ‘역사결의’.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중국공산당 역대 ‘역사결의’.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이날 통과된 ‘역사 결의’는 중공 100년 역사상 세 번째 결의다. 첫 번째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는 마오쩌둥 주도로 지난 1944년 5월 옌안(延安)에서 개막한 6기 7중 전회에서 11개월에 걸친 격론 끝에 이듬해 4월 20일 통과됐다. 마오는 통과 사흘 뒤 7차 당 대회를 열고 자신의 이름을 명기한 ‘마오쩌둥 사상’을 당의 헌법에 기재하면서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다. 당시 마오의 나이는 52세였다.

두번째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는 덩샤오핑 주도로 1981년 6월 27일 폐막한 11기 6중전회에서 일치 통과됐다. 마오쩌둥과 문혁 공과를 놓고 이른바 ‘4000인 회의’로 알려진 치열한 토론을 거쳐 “마오쩌둥은 공적이 제일이고, 잘못은 두 번째”라는 결론에 합의했다. 당시 6중전회에서 덩은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거머쥐며 당내 일인자 지위를 확립했다. 당시 덩의 나이는 7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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