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외는 사람이 많은 사회/544돌 한글날에 부쳐/김주연(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즉 말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이 평범한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사회라면 문화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그렇다면 어떠한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이 문제를 오랫동안 살펴본 나의 판단이다.
입만 열면 문화인과 문화민족을 자처해온 우리들이지만 한국인들은 말의 중요성을 그리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으로부터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비근한 예로 우리는 『말만 잘하면 무엇하느냐』라든가. 『말만 많다』는 이야기가 언어에 대한 폭력적 사고를 대변하는 말로 횡행하고 있음을 본다. 정치하는 사람들,사업하는 사람들… 기타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말은 이렇듯 핍박당하고 있다.
○말이 천시당하는 세태
심지어 말을 먹고 사는,말과 가장 관계가 깊다고 할 문학인ㆍ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말은 종종 천시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에 비해 행동,혹은 실천이 우월시되는 세태는 비록 그것이 갖고 있는 올바른 지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언어에 대한 뿌리깊은 폄하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마저 말을 아끼고,그 중요성에 관심을 갖기보다 한낱 기능적인 전달수단으로 말을 막 부리고 있는 느낌이다. 새로운 시대의 모체언어라고 할 수 있는 텔리비전에서의 그 모습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말을 우습게 알고 있는지 그 단면을 부끄럽게 노출시키고 있다.
한글날이 지나가고 있지만 해마다 기념행사 이상의 사회적 인식으로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깊이 있는 환기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 환기의 올바른 현장은 말의 중요성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어야 하고,이 교육은 사회전반을 대상으로 한 사회교육과 더불어 학교에서 국어교육의 전면 재검토로 이어져야 한다. 이 기회에 나로서는 다음 몇가지를 문제로 제기하고 싶다. 첫째,말의 중요성과 관련해 우리는 인간=언어라는 인식을 훈련해야 할 것이며,그 훈련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줄기차게 행해져야 할 것이다.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짓는 최종의 조건은 결국 언어이며,인간의 사상이나 이성도 언어와 더불어 형성되는 것이다. 단순한 표현도구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다.
둘째,이같은 인식 아래서 우리말과 글,즉 국어교육이 새로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지금의 국어교육은 국민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언어,곧 사고라는 인식이 등한시되는 상황아래서 초등 국어교육부터 문자언어와 음성언어 연습으로 시종하고 있을 뿐 의미언어로서의 기능에 대한 교육은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뿐더러 문법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올바른 글에 대한 판단을 유도해내지 못하는 국어교육이 되고 있다.
유럽 많은 나라들의 국어교육 과정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시 읽기와 시 외기다. 그것은 모국어의 음성학적 아름다움에 대한 훈련과 더불어 의미론적 훈련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국어교육도 새로 해야
국어를 잘 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단순히 글을 잘 읽고 쓴다는 차원을 넘어 깊고 조직적인 사고를 하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을 뜻하며,나아가서 언어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까지 뜻한다. 비록 지식인 계층이 아니라 하더라도­노동자나 하급 공무원들에게서라도­시를 줄줄 외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을 이들 나라들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그가 청소원이든,경찰관이든 시를 외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폭력과 반인간적 행동을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언어를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서 전면적으로 수용할 때,그 언어는 살아 숨쉬며 인간의 삶을 성장시키고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
셋째,올바른 국어교육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서 이제 제대로 된 국어사전이 나와야 될 것이다. 벌써 오래 전부터 그 시급성이 강조되어 온 이 문제는,그러나 여전히 그 해결의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제 나라가 새롭게 세워진 지 반세기가 되어가건만 올바른 제나라 말 사전 하나 없다니 이것이 대체 무슨 꼴이겠는가.
올림픽을 치르고,선진국 문턱에 이르렀다고 수선을 떨지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건국도상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전이 없다는 것은 말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며,그것은 결국 한국인 모두 정신 없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치적 혼란을 포함한 모든 혼란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말을 제대로 하고,쓸 줄 모르는 민족이라면 정치고 뭐고 제대로 하겠는가. 문법사전이 없으니 문법이고 뭐고 쓰는 사람마다 제 마음 대로고,발음사전이 없으니 소리나는 대로 제각각이다. 단어나 문장 그 어느 것에도 정해진 운율이 없으니 시인이 자기 시를 낭송하더라도 읽을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울릴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결핍과 혼란에 대해 그 해결의 길을 요약해 본다면 국어사전은 매해 반복되는 국책사업으로 시급히 착수될 것,그리고 현행 국어교육은 초ㆍ중 등 교과서부터 전면 개편되어야 할 것으로 정리된다.
올바른 국어교육을 받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시민 교양교육으로 국어교육은 질적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영어나 수학처럼 국어도 과외공부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이미 국어교육이 아니다.
○해마다 새 사전 펴내야
상세하고 심도 있는 사전이 해마다 간행되면서 이에 근거한 풍부한 예문으로 된 국어교과서가 있다면 학생을 포함한 우리 모두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풍족한 국어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국어 속에 우리의 역사가 숨쉬고,그 속에 오늘의 현실이 총체적으로 반영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정직한 얼굴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사회에 대한 구호적 비판이 그 사회의 구조발견으로부터 가능하다면 올바른 국어교육은 말의 깊은 뜻에서 올바른 정치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긴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숙명여대 교수ㆍ문학평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