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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병들 "홋줄 맞아 X져라"…강감찬함 정일병 극단선택 전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9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임태훈 소장이 해군 정 일병 사망사건 관련 강감찬함 지휘부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제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군인권센터는 이날 정 일병의 핸드폰 포렌식을 통해 입수한 정 일병과 함장 간의 메시지, 정 일병이 동기에게 보낸 메시지 등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9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임태훈 소장이 해군 정 일병 사망사건 관련 강감찬함 지휘부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제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군인권센터는 이날 정 일병의 핸드폰 포렌식을 통해 입수한 정 일병과 함장 간의 메시지, 정 일병이 동기에게 보낸 메시지 등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해군 강감찬함 소속 정 모 일병이 선임병들로부터 가혹 행위를 당했지만 적절한 보호조치를 받지 못했고,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정 일병이 생전 사용하던 휴대전화 포렌식 결과가 공개됐다. 휴대전화에는 정 일병이 선임병들로부터 “홋줄 맞아 뒤지면 좋겠다”는 등의 폭언을 듣고 괴로워한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군인권센터는 9일 보도자료를 통해 정 일병의 휴대전화 포렌식 결과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앞서 센터는 지난 9월 7일, 정 일병이 선임병들로부터 폭언, 구타, 따돌림 등의 가혹 행위를 당한 뒤 건강상태가 급속히 나빠졌음에도 지휘관들이 적절한 조처를 해주지 않아 결국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된 사건을 폭로한 바 있다.

센터에 따르면 정 일병은 지난 3월 16일 갑판에서 근무를 보던 중 업무에 미숙하다는 이유로 선임병 상병 C로부터 폭행, 폭언을 당했다. 같은 날 오후 8시경 정 일병은 함장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로 피해를 신고했다.

“일을 서툴게 하던 저를 밀치며 말했습니다. ‘씨X, 너 뭐하는데? 그럴거면 가라. 꺼져라!’ 그러나 저는 후임병으로서 ‘제가 맡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저를 다시 밀치며 ‘꺼지라고 씨X!’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함께 정 일병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으로 자해했다는 말과 집단 따돌림으로 인해 자해 충동, 자살 생각이 이따금 든다는 점도 호소했다. 또 상병 C의 전출 조치를 희망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13일 오후 부산 남구 해군작전사령부 부두에서 청해부대 30진 강감찬함(DDH-979·4400t급·사진 앞)이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는 자료 사진)

13일 오후 부산 남구 해군작전사령부 부두에서 청해부대 30진 강감찬함(DDH-979·4400t급·사진 앞)이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는 자료 사진)

피해 신고는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함장은 답장을 바로 보냈을 뿐, 어떠한 즉각적인 조치도 하지 않았다. 가장 우선돼야 할 피·가해자 분리도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관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정 일병은 더욱 극심한 가혹 행위에 시달려야 했다. 정 일병은 그날 밤 선임병 3명으로부터 “네가 죽어서 우리 배를 빨리 떠나면 좋겠다”,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홋줄 맞아 뒤지면 좋겠다.” 등의 폭언을 들었다.

이튿날 함장이 정 일병의 보직을 변경하고 함 내에서 다른 격실(내무실)로 자리를 옮겨주긴 했지만, 여전히 정 일병은 가해자인 선임병들과 같은 함정에서 근무하며 마주쳐야 했다. 휴대전화에는 당시 정 일병이 친구, 동기 등에게 메시지를 보내 “환청이 들리고, 불안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심하다” “열흘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에 혼자 운다”고 호소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제43조는 군인이 병영생활 중 다른 군인이 구타, 폭언, 가혹 행위, 집단 따돌림 등 사적 제재를 한 사실을 알았을 때는 즉시 군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함장, 부장 등은 지휘관으로서 폭언, 폭행 등 명백한 위법 행위를 보고받았음에도 군 수사기관에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 이들은 동법 제45조가 규정한 피해자 보호 의무도 이행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정 일병에게 가혹 행위를 했던 선임병들은 정 일병이 새로 배치된 부서 선임들에게 정 일병 뒷말을 하는 등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3월 28일 정 일병은 주임원사에게 가해자들의 처벌에 관한 계획, 진행 상황 등에 대해 문의했다. 당시 정 일병은 “벌점 부과로 마무리된다”는 답을 들었다.

같은 날 저녁 정 일병은 함장에게 다시 장문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 자신의 건강상태가 악화한 상황을 자세히 전했다. 정 일병은 메시지를 통해 불안 증세를 구체적으로 기술했고, 자살 충동이 자주 든다는 호소도 전했다. 감정 기복이 크고, 소화가 잘 안 되며, 업무 수행 중 이유 없이 구토, 과호흡 등이 찾아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도 담았다. 특히 이러한 증세가 가해자들을 마주칠 때마다 심해진다는 말도 덧붙였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신과 치료와 하선 후 육상 전출을 희망한다는 요청도 기재했다.

그러나 가해자들에게 내려진 조치는 ‘벌점 부과’가 전부였다. 강감찬함 함장은 4월 6일 정 일병이 뒤늦게 하선해 병가를 나가자 함장은 군기지도위원회를 열어 가해자들에게 벌점 조처를 내리고, 정 일병을 도움 병사(C등급)로 지정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뿐만 아니라 함장은 정 일병에게 “네가 견뎌봐라” “노력해 봐라”라고 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센터는 “강감찬함 지휘부는 정 일병의 폭언, 폭행 신고를 받고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 공간에 방치하고,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았으며, 사건도 함 내에서 무마시켜버렸다”며 “이로 인해 피해자는 2차 피해와 극심한 스트레스에 놓였고,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자살 충동을 호소, 전출 등을 요구했으나 이마저도 즉각적 보호 조치로 이어지지 않았다. 방치된 가운데 증세가 심각해진 정 일병은 결국 병가를 나가 폐쇄 병동에 입원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센터는 강감찬함 함장 A 대령과 부장인 B 중령(진)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기로 했다. 센터는 “군이 가해자의 편에서 피해자를 궁지로 몰아넣고 참극을 빚어내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국방부 장관이 머리를 숙여 일곱 번이나 사죄해도, 해군참모총장 등이 쇄신이니 개혁을 외쳐도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계속 터져 나온다. 장관 이하 군 수뇌부가 상황 모면 외엔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며 “군은 절대 반성 없는 사과가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인권위가 나서 바로잡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전문가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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