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일타강사 구나단, 농구 코트를 뒤집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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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지난 4일 도원체육관에서 만난 여자프로농구 신한은행 구나단 감독대행. 한때 영어 학원가에서 일타강사였다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정시종 기자

지난 4일 도원체육관에서 만난 여자프로농구 신한은행 구나단 감독대행. 한때 영어 학원가에서 일타강사였다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정시종 기자

“‘틴틴 중앙’에 ‘케이팝 노래방’이란 코너를 1년 반 정도 연재했어요.”

신한은행 2위 깜짝 돌풍 이끌어 #캐나다 이민가 대학까지 농구선수 #지도자 되려고 무작정 한국행 #"행복 찾으려 농구 선택했어요"

인천 도원체육관에서 만난 여자프로농구 인천 신한은행의 구나단(39) 감독대행이 재미있는 얘기를 먼저 꺼냈다. 그는 “지드래곤 같은 케이팝 스타의 노래를 영어로 번역해 독자들의 영어 공부를 도왔다. 반응이 좋아서 중앙일보 본사에 간 적도 있다”며 웃었다.

당시 지면에 그는 ‘파고다어학원 종로 구나단 선생님’으로 소개됐다. 당시 ‘일타강사’였던 그는 9년이 흘러 프로농구 감독이 됐다. 지난 7월 신한은행 코치에서 감독대행으로 승격한 것이다.

구나단 신한은행 감독대행이 과거 틴틴 중앙에 연재한 케이팝 노래방.

구나단 신한은행 감독대행이 과거 틴틴 중앙에 연재한 케이팝 노래방.

시즌 초 신한은행의 돌풍(3승 1패, 공동 2위)을 이끄는 구 감독대행의 작전타임이 화제다. 90초 짧은 시간 안에 족집게 강의처럼 귀에 쏙쏙 박히게 설명한다. 그래서 별명이 ‘코트 위 일타강사’다. 그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넷플릭스에 나가야 할 것 같 같다”며 웃었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1세 때 캐나다 해밀턴으로 이민 갔고, 서 존 맥도날드 고등학교에서 농구선수로 뛰었다. 그는 “내 키(1m79㎝)가 제일 작아 ‘쇼티’라 불렸다. 내 생존법은 우리 팀뿐 아니라 상대 전술까지 싹 외우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22살에 모학 칼리지 선수로 뛰다 인대가 파열됐다. 그러자 그를 예뻐하던 감독이 코치직을 제안했다. 2005년에는 맥마스터 대학 코치 제의도 받았다. 그는 “코치를 맡기 위해 공부해서 재입학했다. 경제학을 전공했고 졸업할 때 교생 자격증도 땄다”고 말했다.

2009년 캐나다 한인 신문에 ‘서울 명지대에 농구 전문 과정 강의가 개설된다’는 글을 우연히 본 그는 한국 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지도자가 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는 “먹고 살아야 하니 서울 초등학교 영어 강사로 일했다. 2010년 경주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 만찬 사회도 봤다. 종로 파고다어학원 강사 자리를 선배가 소개해줬다. 농구처럼 일에 미쳐서 준비했더니 3개월 만에 대박이 났다. 월수입이 수천만 원일 때도 있었다”고 떠올렸다.

구나단 감독대행의 일타 강사 시절 모습. [사진 유튜브 캡처]]

구나단 감독대행의 일타 강사 시절 모습. [사진 유튜브 캡처]]

훈훈한 외모에 다정한 말투로 단숨에 스타 강사로 등극한 그는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이러려고 한국에 온 게 아닌데…. 난 진짜 농구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스타 강사를 포기하고 2014년 결혼한 아내와 캐나다로 돌아갔다. 무명 지도자라도 농구를 더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명지대 강의에서 알게 된 이문규 중국 상하이 여자팀 감독이 코치를 제의했다. 두 시즌 동안 이 감독을 보좌한 후 정상일 감독 제의로 2019년 신한은행 코치로 왔다. 건강 문제로 물러난 정 감독 대신 그가 대신 지휘봉을 잡게 됐다.

구 감독대행은 “코트 안에서 심판은 물론 계측하는 분조차 나를 잘 모른다. 내겐 학연·지연이 없다. 그런데도 신한은행이 기회를 줬다. 내 이름 ‘나단’이 성경에서 왕에게도 쓴소리하는 사람인 것처럼, 내 길을 묵묵히 가겠다”고 했다.

여자프로농구 시즌 초반 신한은행 돌풍을 이끌고 있는 구나단 감독대행. 한때 영어 학원가에서 일타강사였다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정시종 기자

여자프로농구 시즌 초반 신한은행 돌풍을 이끌고 있는 구나단 감독대행. 한때 영어 학원가에서 일타강사였다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정시종 기자

신한은행은 함엄지가 무릎 부상으로 빠져 키 1m78㎝ 김단비가 센터를 맡고 있다. 1m80㎝가 되지 않는 5명으로 ‘스몰 라인업’을 짠 신한은행은 벌써 3승을 올렸다. 최근 가드 김애나가 다치자 포워드 유승희를 가드로 돌린 것도 구 감독대행의 결정이었다.

지금도 유튜브에 그의 일타강사 시절 동영상 강의가 떠돈다. 그에게 한국 농구계의 콩글리시를 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구 감독대행은 “한국에서 못 넣으면 ‘메이드 좀 해’라고 하는데, 메이드는 이미 들어간 슛이다. ‘메이크 어 샷’이라 해야 한다. 뱅크샷이란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보통 백보드샷, 글라스라고 한다. ‘미트 아웃’은 옛날 말이고 요즘 ‘팝 아웃(스크린하다가 외곽으로 빠지는 것)’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설명해줬다.

그에게 영어 좌우명을 물었더니 ‘Stay focused, Stay humble, Keep grinding’이라고 했다. ‘다 됐다고 생각할 때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는 “난 남들보다 부족해 서너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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