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논술 학교서도 된다" 자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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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고교 학생들이 논술교사 4명을 둘러싸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윤석철·강현식·강방식·권영부 교사. 김형수 기자

"지범아, 뭐가 떠올라. 필재는 어떻게 생각해."

3일 오후 4시 서울 강동구 둔촌동 동북고 1학년 15반. 강방식(37.윤리) 교사가 1학년생 30여 명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날 수업은 방과 후 수업으로 진행되는 '수학.과학 통합논술'. 수능이 끝나면 고3 학생들이, 12월 이후엔 고2 학생들이 이 통합논술 수업에 합류한다. 전체 재학생 2000여 명 중 100여 명이 통합논술을 배운다.

이날 학생들에게 제시된 글은 세 가지다. ①우리 몸에 있는 효소 ②수학 함수 ③세계 1차대전 발발의 계기가 된 1914년 사라예보 저격사건. 이것들의 공통 요소를 찾아 토론하는 것이다. 강 교사는 "자, 말을 해봐…"라며 토론을 유도했다. 아이들은 쑥스러워하며 한동안 꿀 먹은 벙어리다. 얼마가 지났을까.

남현군이 말문을 열었다. "촉매와 도화선이 연결돼 있어요." 유승민군이 말을 잇는다. "맞아. 효소는 촉매 역할, 수학 함수에서 매개변수, 사라예보의 총소리…그게 서로 연관돼 있어요."

20분간 토론이 진행된 뒤 두 번째로 강현식(34.물리) 교사가 분필을 잡았다. 그는 칠판에 '촉매란?'이라고 쓴 뒤 개념을 설명했다. 곧바로 윤석철(36.수학) 교사는 "수학에서 변수를 매개변수로 치환하면 문제를 풀 수 있다"며 수학에서의 촉매 개념을 소개했다. 권영부(47.경제) 교사는 사회변동을 들고 나왔다. "80년 민주화 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서울의 봄은 민주화 세력이란 정촉매(반응을 빠르게 하는 촉매)에 의해 가능했지만 군부세력이란 부촉매(반응을 느리게 하는 촉매)에 의해 저지됐지."

교과목이 다른 4명의 교사가 진행한 토론은 80여 분간 진행됐다. 주제는 '촉매'였지만 학생들은 교사에 따라 과학.수학.세계사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통합 교과형 토론'이다.

토론 후에는 실전 문제가 제시됐다. "다음은 인류가 직면한 어떤 공통된 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안의 성격을 지닌 글이다. 이 문제가 뭔지 서술하고, 이를 에너지 분야에 적용해 보시오."

월드컵 광고, 종자 보존운동, 유엔을 지배하는 힘의 논리에 관한 글이다. 학생들은 30분 동안 글의 개요를 썼다.

안영석군은 "쉽지 않은 문제"라며 "세계화로 야기되는 독점의 문제가 핵심인 거 같다"고 말했다.

학생들에겐 교과 중심으로 수업하다가 방과 후엔 통합 교과로 배우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남현군은 "논술학원에 다녀봤지만 여러 과목을 통합하는 논술은 배우지 못했고 결국은 국어나 글쓰기 중심이더라"며 "우리 학교에선 선생님들이 함께 나오기 때문에 재미있고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동북고가 처음부터 '통합논술 잘 가르치는 학교'였던 것은 아니다. 교사 4명으로 구성된 통합논술팀이 가동된 건 올 3월부터. 젊은 교사들이 "서로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우리가 뭉쳐서 한번 통합논술을 해 보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교사들은 각자 가르치는 수학.과학.윤리.경제 과목에서 중요한 개념들을 뽑았다. 서로 모여 아이들의 통합적 사고에 걸맞다고 생각되는 주제를 정했다. 4명 중 가장 연장자인 권 교사는 "교사들끼리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모여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로 연구를 했다"며 웃었다.

이런 교사들의 노력은 제자인 학생들로부터 보답을 받았다. 아이들은 처음엔 "왜 그러지?"라고 물으면 시큰둥하게 "그냥요"만 반복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다. 점점 자기 생각을 말하며 수업에 빠져든 것이다. 교사들은 "이제는 우리가 '수업 끝내고 그만 가자'고 할 정도"라고 기뻐했다.

교사들 자신도 변했다. 권 교사는 "논술 아닌 내 과목만 가르칠 때도 주입식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묻고 대답을 듣는 수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강방식 교사는 "통합논술은 2호선을 타는 학생(서울시내 주요 대학이 지하철 2호선 역 주변에 있음)만을 위한 게 아니다"라며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교사는 "사교육이 아니면 통합논술이 안 된다는 얘기는 진실이 아니다"라며 "우리가 해 보니까 되더라. 공교육에서도 얼마든지 논술을 잘 가르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수업은 부산시교육청 최용실 장학사도 지켜봤다. 그는 "공교육에서 통합 교과형 수업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며 "(이 학교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양영유.강홍준.이원진.김은하.박수련 기자<yangyy@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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