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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심진보의 미래를 묻다

증강인류의 등장, 21세기 신 르네상스 시대 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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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심진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기술전략연구센터장

심진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기술전략연구센터장

14세기에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 즉 흑사병은 가톨릭과 봉건제로 대표되는 중세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페스트균에 목숨을 잃는 미증유의 참극 속에서 유럽인들은 신이 아닌 인간을 돌아보고, 신에 예속된 인간으로부터 자연스러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이런 생각들이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르네상스를 태동시켰다. 그래서 르네상스는 단순히 고전으로의 회귀나 문예부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 사상이 기저에 깔린 사회변혁 현상이기도 하다. 즉, 유럽인들은 14~16세기의 르네상스를 통해 인간의 본질과 아름다움을 재탐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르네상스의 정신이 17세기에 과학정신과 결합하면서 유럽이 근현대 세계사의 주역으로 도약하는 기회를 맞게 된다.

21세기, 인류는 다시 한번 르네상스 시대를 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인간의 능력이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증강 인류’의 등장 때문이다. 증강인류(Augmented Humanity)는 한 마디로 과학기술의 힘을 이용하여 감각·지능·육체적 능력이 크게 향상된 인간들을 의미한다. 흔히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다양한 정보로 인해서 감각과 지능이 크게 향상된 인간을 증강인간으로 설명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휴먼 증강’과 관련된 기술의 진화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증강의 범위 역시 감각증강·인지증강·신체증강 등으로 점차 확장되고 있고, 따라서 증강인류의 개념 역시 확장 중이다.

과학기술의 힘으로 인류 능력 향상
외골격 로봇 이용한 신체 증강
두뇌 임플란트와 클라우드 기술
수명 연장 넘어 수명 선택 시대로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또 다른 기업 뉴럴링크는 일본 SF영화 ‘공각기동대’처럼 컴퓨터 속 데이터를 인간의 두뇌에 이식하는 등 뇌-기계 인터페이스를 연구·개발한다. 사진은 일론 머스크와 뉴럴링크의 구상을 형상화한 그래픽이다.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또 다른 기업 뉴럴링크는 일본 SF영화 ‘공각기동대’처럼 컴퓨터 속 데이터를 인간의 두뇌에 이식하는 등 뇌-기계 인터페이스를 연구·개발한다. 사진은 일론 머스크와 뉴럴링크의 구상을 형상화한 그래픽이다.

이런 증강인류의 등장과 개념 확장은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의 영역을 새로 쓰게 만들 것이다. 즉, 과거의 르네상스가 ‘인간의 본질과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였다면, 21세기의 새로운 르네상스는 ‘인간의 범위와 능력’에 대한 탐구가 될 것으로 필자는 전망한다. 즉, 수많은 휴먼 증강 기술들이 인체에 삽입·부착·착용되는 시대를 맞이해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인간의 능력과 수명은 과연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이를 통해 인류가 재도약하는 신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증강인류의 시대를 열게 해 줄 휴먼 증강 기술들은 현재 어느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을까. 지금까지 연구·개발된 관련 기술들을 살펴보면, 인간의 장애를 극복하고, 신체적 능력을 강화시키는 수준에는 이미 어느 정도 도달해 있으며, 2030년대 안에 인간의 뇌 역량을 증강시키고, 뇌를 클라우드에 연결하는 단계에도 근접할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최근 인간의 육체적 역량을 강화시키는 신체증강 기술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미국 록히드마틴은 90㎏ 무게의 군장을 멘 군인이 시속 16㎞ 속도로 달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외골격 로봇 ‘HULC’를 개발해 이미 실전 배치에 나섰다. 또한, 일본 벤처기업인 사이버다인은 근위축증으로 보행이 불편한 환자를 돕는 의료용 슈트인 ‘HAL’을 개발했다. 이 슈트는 일본 정부에서 의료기기로 승인되어서 공적 의료보험의 대상에 포함되기까지 했다.

한편, 인간의 뇌에 칩을 삽입하는 두뇌 임플란트 기술도 속속 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2019년 10월에는 프랑스의 그르노블대학교 연구팀이 사지마비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의 뇌 속에 칩을 심어서 뇌의 신호만으로 외골격 로봇을 조종하는 실험에 성공한 바 있다. 일론 머스크의 또다른 기업 뉴럴링크에서는 지난해 뇌-기계 인터페이스 칩의 일종인 ‘LINK V0.9’를 소개했다. 해당 칩을 돼지의 뇌에 이식해서 돼지의 코에서 뇌로 전달되는 신호를 실시간으로 수집한 후에 이를 데이터화하는 장면을 공개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구체적인 임상실험 계획이 발표되지는 않은 상황이지만, 수천 개의 미세한 전극을 뇌에 연결해 마비와 오감 장애 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연구성과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론 머스크는 빠르게 진화하는 인공지능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뇌에 칩을 이식하는 등의 수단으로 인간의 지능을 증강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따라서 LINK V0.9는 단순히 마비·장애의 치유를 넘어 증강인류를 향해 나가는 연구개발 과정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저명한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2035년까지 우리의 두뇌를 클라우드에 원활하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즉, 2030년대에 인간의 뇌에 뉴럴링크의 LINK 같은 유형의 칩이 이식되고, 이 칩들이 클라우드로 연결되어 데이터를 주고받는 미래가 도래할 것이란 말이다.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 평가받는 한국 역시 휴먼 증강과 관련된 정책 추진과 연구·개발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8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과학기술 미래 전략 2045’에는 인간의 신체적·지적 능력을 보완하고 확장하기 위해 신체에 부착·삽입할 수 있는 신체증강 장비 및 로봇, 인체 모방 설계기술 개발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삼성이 2017년에 선보인 외골격로봇 GEMS,  LG전자가 2018년에 공개한 LG CLOi SuiteBot 등의 신체증강 기술들이 이미 개발되어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는 엑소스킨(Exoskin) 기술을 개발 중이다. 엑소스킨은 인간 신체의 피부와 같이 자율적·지능적으로 신체를 유지·보호하는 한편, 일상생활에서도 근력을 보조할 수 있는 휴먼증강 소프트 수트를 말한다. ‘ETRI 기술발전지도 2035’에서는 이렇게 근력보조 기술, 생체유지 기술, 감각전달 기술 등이 인공지능과 결합해 착용감 높고 유연하게 작동하는 수트 형태로 제공되는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즉, 엑소스킨 같은 휴먼증강 수트가 2030년대에는 상용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휴먼증강 기술이 속속 적용되면서 실제로 증강인류가 보편화한다면 그 미래상은 어떤 모습이며, 또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될까. 가까운 미래에는 생산성의 향상과 편리성의 증대라는 현상을 목도할 것이 분명하다. 다양한 형태의 웨어러블 기기나 수트를 착용하여 지금까지 인간의 몸으로는 낼 수 없었던 근력을 발휘하면서 산업현장 또는 전장을 휘젓는 증강인류, 감각과 인지력·기억력이 비약적으로 향상하여 업무효율을 극대화시키는 증강인류의 모습이 바로 그런 현상이다.

2019년 8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표지논문에 실린 초경량 엑소수트. 입기만 하면 걷고 뛰기를 도와주는 웨어러블 로봇이다.

2019년 8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표지논문에 실린 초경량 엑소수트. 입기만 하면 걷고 뛰기를 도와주는 웨어러블 로봇이다.

2030년대 이후에는 증강인류와 기계인류가 공존하는 시대, 즉 인간 중심성이 해체된 시·공간을 맞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적인 존재로서 군림해왔다. 그러나 트랜스휴머니즘 또는 포스트휴머니즘 등의 새로운 철학적 조류를 통해 ‘인간과 기계를 구분할 수 있는가. 즉, 인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미래에 인간과 기계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인간과 기계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대두되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따라서 인류는 인간 스스로 증강시키고, 기계인류를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이런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고, 합의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인류는 궁극적으로 휴먼증강 기술과 바이오프린터·생명공학 등의 진화에 힘입어 수명 연장의 시대를 넘어 수명 선택의 시대를 맞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20세기에 인류는 거의 2배에 달하는 평균 수명의 연장을 경험했다. 그러한 수명연장의 결과, 노동시간 증대에 따른 산업생산력 향상을, 그리고 지식과 정보가 뇌에 축적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과학기술의 폭발적인 진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증강인류의 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인간의 평균 수명은 또 한번 크게 연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구글벤처스의 설립자인 빌 마리스는 21세기 내에 인간이 500살까지 사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500살까지는 아니어도 인류의 평균 수명(약 80세)이 현재의 배로만 연장된다면 우리 삶의 모습, 산업구조, 가치관, 교육시스템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60세 무렵에 은퇴해서 노후를 100년 넘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아마도 개개인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그 선택의 폭은 달라지겠지만, 인류는 스스로 수명을 선택할 수 있는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증강인류의 등장이라는 현상은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현재의 연구·개발 상황을 볼 때 그 속도는 점차 가속화할 것이 분명하다. 증강인류는 인류가 오랫동안 꿈꿔오던 인간의 모습을 실제로 구현해줄 것이기에 그 연구·개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제 인간의 능력과 수명을 높이는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적 차원에서 휴먼 증강 분야의 기술적 우위를 점하거나, 최소 대등한 기술적 수준을 갖추어야만 하는 상황에 이미 놓여있다. 아울러 신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를 맞아 과학기술과 인문사회학의 융합적 사고를 바탕으로 증강인류의 개념과 범위를 빠르게 정립해야 하는 숙제도 눈앞에 놓여있다. 과거 유럽은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의 결합을 통해 세계사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결국, 21세기의 국가경쟁력은 증강인류의 시대라는 상황과 신 르네상스라는 숙제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심진보

1972년생. 충남대에서 경영학으로 학·석·박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입사, 기술정책연구실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대한민국 제4차 산업혁명』 『한국 제4차 산업혁명 연구』 『신기술과 소비자이슈』 『포스트 바디; 레고인간이 온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