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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부 에이스 줄사표…경제부처는 '중·국·산·고·기' 자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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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관가(官街)에서 ‘중·국·산·고·기’라는 신조어가 떠오르고 있다. 중소기업벤처부·국토교통부·산업통상자원부·고용노동부·기획재정부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31일 주요 정부부처 공무원과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 등에 따르면 이들 5개 경제 관련 부처는 문재인 정부 들어 스트레스와 업무 강도가 유독 강한 곳으로 분류되며 중·국·산·고·기라는 약어로 묶여 불리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 최저임금 인상, 부동산 정책, 탈원전 등 현 정부의 국정과제 이행의 총대를 멘 곳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우선 한국 경제 정책의 ‘컨트롤타워’로 불리는 기재부의 위상은 이번 문재인 정부 들어 추락하다시피 했다. 긴급재난지원금·추가경정예산·부동산 세제 등 굵직한 경제정책은 대부분 여당에서 주도했다. 경제관료의 전문적인 판단보다는 정치적 셈법이 우선시되다 보니, 경제정책 결정 구조가 청와대·여당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해석이 많다. 핵심 의사결정에서 기재부의 의견이 묵살되는 이른바 기재부 ‘패싱’ 논란이 수시로 불거지는 배경이다.

수습사무관의 선호 부처 지망에서도 기재부의 위상 하락이 드러난다. 과거에는 행정고시 수석·차석 합격자가 앞다퉈 지원했지만, 요즘은 하위권 합격자도 들어갈 수 있는 부처가 됐다. 올해 수습사무관 부처 배치 현황을 보면 일반행정직 1~5등 수습사무관 중 한 명도 기재부를 선택하지 않았고, 재경직 1~5등 중에서도 기재부로 배치된 수습사무관은 1명이었다.

산업부는 30·40대 중간관리자들의 민간 이직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통상·무역업무를 담당했던 H과장은 지난 18일 공직을 떠나 한 중견기업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 조치 이후 한국 대표로 협상에 나섰던 인물이다. 산업부 내에서 장래를 촉망받던 ‘에이스’로 꼽히던 이들의 퇴직에 내부에서 동요가 적지 않다. 에너지 기술을 담당했던 P과장이 한 대기업으로 이직했고, 기계·로봇 관련 업무를 총괄했던 또 다른 H과장도 퇴직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의원에 따르면 문 정부 출범(2017년 5월) 이후 올해 9월까지 산업부를 떠난 부이사관(3급)·서기관(4급) 공무원은 61명이다.

경제부처들 ‘중·국·산·고·기’ 자조, 위상하락 기재부 지원 줄어

공무원 엑소더스

공무원 엑소더스

2019년 일본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 관련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의 역전승을 이끌며 이른바 ‘후쿠시마 어퍼컷’의 주역으로 불렸던 K사무관이 이직하는 등 사무관(5급)까지 합치면 30·40대 퇴직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든든한 신분 보장과 공무원연금, 해외공관 근무 등의 혜택을 마다하고 민간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여러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산업부는 탈원전의 선봉에 선 곳이다.

청와대에서 내려오는 일방적인 업무 지시와 무리한 정책 전환 요구 등이 공직생활의 회의감을 키웠다. 정권이 바뀌면 언제든지 책임 소재에 휘말릴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여기에 인사 적체에 대한 불만, 고위직에 오를수록 민간 이직이 어려워지는 제약 등이 쌓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산업부 관계자는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 추진 과정에서 이른바 옛 정권의 에너지 라인이 숙청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봤다”며 “전 정권에서 열심히 일했다는 이유로 옷을 벗거나, 불이익을 받는 선후배를 보면서 공직사회가 ‘행정’이 아닌 ‘정치’가 되고 있다는 실망감이 크다”고 전했다.

조직에 대한 불만도 많다. 월성1호기 조기 폐쇄로 검찰 조사와 감사 등을 받는 과정에서 조직 구성원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또 최고위급 인사의 정치권 줄대기·갑질 논란이 벌어지고, 성과를 낸 직원이 보상받는 시스템이 제 기능을 못 하면서 묵묵히 일하던 과장들의 소외감이 커졌다는 게 내부 목소리다. 또 다른 산업부 관계자는 “산업부 내 과장급의 퇴직이 다른 부처나 과거보다 유독 많다”며 “기본적으로 산업부는 시장경제와 기업활동을 중시하는데, 이를 경시하는 현 정부의 정책 기조가 민간 이직을 부추기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국토부는 차가운 부동산 민심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이번 정부에서 25번의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지만, 집값 상승세가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해 새 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전세 매물이 씨가 마르고 전셋값이 급등하는 부작용도 나왔다. ‘25전 25패’로 상징되는 정책 실패 사례다. 국토부 관계자는 “정책에 대한 관심이 워낙 높고, 반응이 시시각각으로 나오다 보니 업무 피로도가 높다”고 전했다.

고용노동부와 중기부는 이번 정부 들어 업무량이 급증했다. 고용부는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일자리안정자금 집행, 주 52시간제 시행, 전 국민 고용보험제 도입 등을 맡았다. 모두 이해관계가 첨예해 이견 조율이 힘든 일이다. 공무원시험 준비생 사이에서 근무환경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근무 기피 부처 1순위에 꼽힐 정도다. 중기부는 이 정부 들어 차관급 ‘외청’에서 장관급 독립 ‘부처’로 체급을 올린 후 업무 중압감이 커졌다. 하지만 혁신 창업, 중소기업 지원, 소상공인 역량 강화 등 바로 성과를 내기 힘든 업무가 많다. 윤영석 의원은 “일을 잘해도 욕을 먹거나, 외풍이 많아 업무가 과도하다는 것이 이들 중·국·산·고·기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하소연”이라고 전했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예전 중앙부처 공무원은 국가 정책을 이끈다는 보람과 자부심으로 격무를 감수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시장 원리를 무시한 정치권의 압박, 공무원을 ‘개혁 저항세력’으로 간주하는 현 정부의 기조,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에 대한 관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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