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설거지론에 드리운 혐오의 그림자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30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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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호 35면

김창우 사회 에디터

김창우 사회 에디터

“‘설거지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스무살 아들이 물었다. 설거지론은 우아하게 코스 요리를 즐긴 사람은 따로 있고, 남은 식기를 설거지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자조적인 표현이다. 남중·남고·남대(주로 공대)를 나와 군 복무와 취업 관문을 뚫고 간신히 기반을 마련했더니, 그동안 다른 사람과 실컷 연애를 즐겼던 아내에게 ATM 취급만 당하고 산다는 의미다. 이처럼 애정을 받지 못하고 ‘설거지 당하는’ 남성을 ‘퐁퐁단’ 혹은 ‘식세기(식기세척기)’라고 부른다.

역차별·취업난 속 이대남의 울분
자학 개그서 남남갈등까지 번져

갑자기 설거지론이 폭풍처럼 퍼진 이유는 모르겠지만, 젠더 측면에서의 역차별과 코로나 이후 취업난에 시달리는 이대남(20대 남성)들이 공감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설카포’는 설거지 고위험군, 카사노바 애인 처리반, 포옹퐁의 약자라는 자학 개그가 많은 추천을 받은 이유다. ‘내무부장관 결재가 없어서 새 컴퓨터를 못 산다’ ‘니들은 결혼하지 마라’고 엄살을 떨었던 3040 형님들도 당황스럽다. ‘가끔 티격태격해도 알콩달콩 잘산다’ ‘용돈 30만원이지만 아내도 함께 허리띠 졸라매고 집 사고 아이 키운다’고 반론해봐야 ‘네다퐁(네 다음 퐁퐁이)’ ‘고성능 식세기 납셨네’ 같은 조롱 댓글이 달리기 일쑤다. 젠더 문제에서 시작해 남남갈등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미국에서도 ‘인셀(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주의자)’ 논쟁이 여성혐오 범죄로 발전하면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인셀은 키 크고 잘 생기고 직업도 좋은 남성인 ‘채드’, 이들과 만나는 젊은 여성 ‘스테이시’에 질투하는 남성을 의미한다. 2014년 5월 미국의 엘리엇 로저는 여성을 매도하는 비디오를 인터넷에 올린 뒤 무차별 테러를 일으켜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2018년 2월에는 니콜라스 크루즈가 로저를 기리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켜 17명이 사망했다. 두 달 뒤 캐나다에서 알렉 미나시언이 ‘인셀의 난’ 선언문을 올리고 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해 한국계 2명과 한국인 유학생 한 명 등 10명이 숨졌다.

우리나라의 설거지론은 여성 혐오라는 기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인셀과 같지만 무차별 범죄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웃어넘기기에는 뒷맛이 씁쓸하다. 어떻게 보면 설거지론은 백신 음모론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백신을 맞은 후 가벼운 후유증을 경험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일부는 중증 장애를 얻거나 심지어 숨지기도 한다. 지난달까지 우리나라에서 6200만건의 코로나 백신 접종 후 사망 및 중증 신고 사례는 1586건(사망 678건, 중증 908건)이었다. 질병관리청은 이 중 사망 2건, 중증 5건만 예방 접종과의 인과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확률이 낮다지만 내가 혹은 내 가족이 부작용에 시달리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백신을 맞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2억4500만명이 확진됐고, 이 가운데 500만명이 숨졌다. 백신이 없었다면?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설거지론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완벽한 가정이 아니라면 한두가지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다. 과거에도 가정이 무너진 기러기 아빠 같은 사례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사례나 일부 갈등만 침소봉대해 모든 결혼한 여성은 꽃뱀이고, 모든 결혼한 남성은 퐁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인 가해자라는 남성혐오론만큼이나 황당한 일이다. 아들아, 엉뚱한 소리에 말려들지 말고 연애나 열심히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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