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만들지 말자, 어지간하면 용서하자"…연성의 리더십[노태우 별세]

중앙일보

입력 2021.10.26 14:34

업데이트 2021.10.26 23:34

“나는 한 시대를 책임졌지만 적(敵)을 만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국정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마음의 자세랄까 철학이 ‘모든 것을 참자. 어지간하면 용서하자. 기다리자’는 신념으로 일관해 왔다.”(노태우 육성회고록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중앙DB]

노태우 전 대통령. [중앙DB]

고인은 연성(軟性)의 리더였다.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평가 받길 원했다.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을 회고하면서 “날씨가 가물 때면 언제 비가 오나 하고 밤에 잠을 못 이루며 창을 몇 번이나 열어봤다”고 말하곤 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이 리더의 전형처럼 여겨지던 시기, 고인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도 있다.

합창부 활동에 빠졌던 유년기  

대구 동구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 대구=백경서기자

대구 동구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 대구=백경서기자

노태우 전 대통령 주요 연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노태우 전 대통령 주요 연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26일 별세한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구 팔공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에서 ‘유성기’를 가진 집은 우리집 뿐이었다. 아버지 무릎에 앉아 아버지가 틀어주는 유성기 소리를 따라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제일 또렷하다”는 회고처럼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었다.

강골은 아니었다. 1945년 3월 대구 공산소학교(공산초교)를 졸업한 뒤 경북중(현 경북고) 진학에 실패해 대구공립공업학교(현 대구공고) 전기과에 입학했다. 그는 “2학년 때 말라리아 합병증으로 장티푸스에 걸려 여러달을 고생했다”고 기억했다. 3학년 때 경북중 편입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뒤 그는 4학년 때 224명 중 102등, 5학년엔 218명 가운데 63등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몸이 약했던 점을 감안하면 괜찮은 편이었다”고 기억했다. 약한 몸 탓에 운동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음악에 소질이 있어 합창부 활동을 하며 여러 대회에서 입상했다.

의사가 되려던 그를 군인 만든 건 6.25전쟁

38선 [중앙포토]

38선 [중앙포토]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보훈병원을 방문, 6.25 참전 상이자를 위로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보훈병원을 방문, 6.25 참전 상이자를 위로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 전 대통령은 중학교 5학년(현재의 고2)이 되면서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이듬해 본격적으로 의대 진학을 준비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의 회고. “학도병으로 종군하거나 소집되는 두 가지 길 밖에 없었다”.  고인은 헌병 학도병으로 군에 몸을 담았다.

38선을 끼고 유엔군과 중공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1951년 초가을, 또 하나의 모집공고는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휴교 중인 육군사관학교가 10월31일을 기해 4년제 정규과정으로 진해에서 재개교한다는 ‘국본 일반명령 163호’였다. 200명을 모집하는데 1400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은 7대1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석차 10위 이내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렇게 들어간 육사에서 그는 대구ㆍ경북 출신 생도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하나회’의 시작이었다. “전두환ㆍ김복동 등이 그런 친구들 외에 손영길ㆍ최성택 등 경남 쪽 친구들까지 가세해 휴가 때마다 함께 어울리곤 해서 다른 생도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그는 기억했다.

12.12… 전방 사단 병력을 끌어오다

12.12 쿠데타 당시 중앙청 앞에 등장한 탱크 [중앙포토]

12.12 쿠데타 당시 중앙청 앞에 등장한 탱크 [중앙포토]

12.12 당시 중앙청(광화문) 앞 [중앙포토]

12.12 당시 중앙청(광화문) 앞 [중앙포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당일(10.26 사건) 전두환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의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에게 유고가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쿠데타의 불씨가 된 인물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정 총장은 김재규의 연락을 받아 현장 가까이 있었다.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며 “직에서 물러나는 게 총장이 취해야 할 자세”라고 의기투합했다.

그들이 다시 만난 건 1979년 12월12일이었다. 청와대를 경호하는 30경비단장실에는 둘 외에도 많은 하나회 장성들이 모였다. 정 총장 연행 과정에서 불만을 가진 수도권 지역 장성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노 전 대통령은 “연행이라는 표현을 그곳에서 처음 들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등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그 순간 그는 이날 밤 쿠데타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자신이 지휘하던 제9보병사단에서 2개 보병연대를 동원해 서울에 진입시켰다.

‘5공화국’ 2인자로서의 삶

전두환 전 대통령이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하는 차규헌,노태우육군대장의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중앙포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하는 차규헌,노태우육군대장의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중앙포토]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대통령 후보로 제청된 후 중집위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대통령 후보로 제청된 후 중집위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노 전 대통령은 5공화국 탄생 과정부터 2인자였다. 회고록에 따르면 1980년 8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시간이 괜찮다면 저녁에 만나자”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나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최규하 대통령이 국정을 맡아달라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일단 사절했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군 원로들의 의견을 물어 결정하자”고 제안했고 전 전 대통령도 그 의견을 따랐다고 한다. 결국 며칠 뒤 최 대통령은 하야하고 전두환 신임 대통령이 취임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권력이 집중되던 국군 보안사의 후임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노 전 대통령이 ‘2인자’ 역을 한 건 그가 전 전 대통령의 빈틈을 채우는 방향으로 처신을 해서라는 평가가 있다. “군에서는 당시 전 대통령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동기생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닻을 올린 역사에 대안이란 있을 수 없었다. 내가 해야할 일은 이들의 마음을 묶는 것이었다. 인화를 신조로 살아온 나는 동기 후배들의 마음을 달래면서 모두가 한 배를 타도록했다. 전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단 한 사람의 배신자도 생기지 않았다.”(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은 81년 여름까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했고, 이후엔 행정부로 자리를 옮겼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러나 본능적으로 ‘2인자’로 불리길 꺼렸다. 그는 회고록에서 “전 대통령은 몇 차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2인자로 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좋게 들리질 않았다. 1인자의 자리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보고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1987년 6월 29일 당 중앙집행위회의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1987년 6월 29일 당 중앙집행위회의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 후보, 김영삼 후보, 김대중 후보의 선거 벽보. [중앙포토]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 후보, 김영삼 후보, 김대중 후보의 선거 벽보. [중앙포토]

임기말까지 불안한 ‘2인자’로 지내던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3월에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사실상 지명됐다. “대통령 선거는 현행 헌법(간접선거)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기 약 한 달 전이었다.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는 6월2일 공식 추천됐다. 일주일 뒤인 10일 열린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는 ‘6ㆍ10 항쟁’의 여파로 최루탄 연기 속에서 치러졌다. 노 전 대통령은 “그날 현행 헌법으로는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일주일 간의 장고 끝에 노 전 대통령은 17일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를 집으로 불러 “직선제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준비를 해달라”고 지시했다. 6월 항쟁이 절정기로 향하던 시점이었다. 전직 대통령과 야당 총재를 잇따라 만난 전 전 대통령도 “직선제 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백기를 들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처음에 “어렵지 않겠냐”고 반문한 노 전 대통령은 이어 “모든 것을 (내게) 맡기고 관여하지 말아 달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후 탄생한 게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6ㆍ29 선언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병기 보좌역에게 ‘내 인생 최고의 절정이 오늘 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1971년 이후 처음 치러진 대통령 직선제에서 약 36%의 득표율로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야당 후보의 단일화가 실패하여 표가 분열된 탓도 컸다.

서울올림픽 유치와 개최

1985년 대한체육회장과 대담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중앙포토]

1985년 대한체육회장과 대담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중앙포토]

노태우 대통령이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참석, 연설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태우 대통령이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참석, 연설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서울올림픽은 노태우 정부의 상징이다. 그는 전두환 정부 시절 총책임자로 올림픽을 유치했고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이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김택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표는 내 표 하나밖에 없다”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당시 제2정무장관이던 노 전 대통령은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1순위로 꼽히던 일본의 나고야를 57대 27로 물리친 배경이다.

이후에도 노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이 올림픽으로 통치를 정당화하려 한다”며 개최지를 바꿔야 한다는 일부 IOC 위원들의 주장에 시달렸다. 그는 “개최지가 바뀌면 잠실 메인스타디움 한가운데 사마란치IOC 위원장과 나머지 81명 IOC 위원의 무덤을 만들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서울올림픽은 총 160개국이 참가한, 가장 성공적인 올림픽 중 하나가 됐다. 동구권에 올림픽 참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쌓인 교분이 외교 관계 수립에도 도움이 됐다.

3당 합당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3자회담을 갖고 보수3당이 주축이 되어 중도민주세력을 총집결시키는 대연합을 이루기로 하는 합당선언문을 공동발표하고 이에 따른 합당절차와 당직배분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중앙포토]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3자회담을 갖고 보수3당이 주축이 되어 중도민주세력을 총집결시키는 대연합을 이루기로 하는 합당선언문을 공동발표하고 이에 따른 합당절차와 당직배분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중앙포토]

위기는 정치에서 찾아왔다. 민정당의 88년 4ㆍ26 총선 참패. 민정당은 125석에 그치며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의 시련을 맞았다. 제1야당 총재인 DJ(김대중)와 제2야당 총재인 YS(김영삼)는 ‘5공 청산’ 등을 내걸고 집권 세력을 협공했다. JP(김종필)까지 한몫 거들었다.

돌파구는 1990년 1월의 3당 합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민정당, YS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JP의 신민주공화당이 합쳐 216석의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됐다. 전통 야권 세력의 절반이 뚝 떨어져 나와 5공 세력과 합쳐졌고 지역적으로는 영남ㆍ충청이 합쳐 호남을 압박했다.

3당 합당이 공표되기 전 ‘전야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89년 12월)이었다. 5공 청문회에서 증인석을 향해 명패를 던지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가 바로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었다. 만약 3당 합당이 없었다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변화는 전혀 다른 궤도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평가가 나온다.

은퇴후 터진 비자금

박계동의원이 증거로 제시한 110억원이 입금된 예금조회표. [중앙포토]

박계동의원이 증거로 제시한 110억원이 입금된 예금조회표. [중앙포토]

12.12 및 5.18 첫 공판에 노태우 피고인이 죄수복을 입은채 출두하고 있다. [중앙포토]

12.12 및 5.18 첫 공판에 노태우 피고인이 죄수복을 입은채 출두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시중은행 40개 차명계좌에 100억원씩, 모두 4000억원이 예치돼있다.”

14대 국회가 끝나기 6개월 전인 1995년 10월 19일,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서 핵폭탄을 터뜨렸다. 박 의원은 은행 계좌번호까지 공개했다. 8일 뒤인 10월 27일 노 전 대통령은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비자금을 조성한 게 사실임을 시인하는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 재직 시 기업인들의 성금으로 약 5000억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해 1700억원가량이 남았다”는 고백이었다.

12ㆍ12 군사반란과 5ㆍ18 내란죄 혐의에 대해서도 검찰의 재수사가 시작됐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당시 부장 안강민)는 그해 11월 노 전 대통령을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특가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노 전 대통령은 9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뇌물 2628억원에 대한 추징을 선고받았다. 반란과 내란 혐의도 유죄가 확정됐다.

그해 말 치러진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된 뒤인 12월 22일 노 전 대통령은 수감 2년1개월 만에 특별사면됐다. 추징금 중 90%가량은 환수됐지만 289억원이 남은 상태에서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2013년 9월 추징금 2628억원을 완납했다. 한 측근은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사건 이후 마음의 병을 얻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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