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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노믹스는 실패였다? 일본은 지금 ‘분배’ 논쟁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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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오는 31일 중의원 선거를 앞둔 일본에서 ‘분배’가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9일 열린 일본 9개 정당 당수 토론회에선 ‘분배’라는 단어가 총 45회나 언급돼 ‘성장’이란 단어가 사용된 횟수(29회)보다 1.5배 많았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이 분석했다.

31일 총선 핵심 공약은 격차 해결 #불황·코로나 사태로 상황 악화돼 #자민당 '분배 없는 성장 없다' 구호 #재원 방안, 장기 비전 실종 비판도

18일 열린 당수토론회에서 '코로나 대책, 새로운 자본주의, 외교·안보'를 자민당의 주요 공약으로 발표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18일 열린 당수토론회에서 '코로나 대책, 새로운 자본주의, 외교·안보'를 자민당의 주요 공약으로 발표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특히 그동안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강조해왔던 집권 자민당이 “아베노믹스가 국민의 실질적인 삶을 개선하지는 못했다”고 인정하며 ‘분배 없이 성장도 없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들고나온 점이 주목된다. 장기 침체에 이어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악화일로인 저소득층의 경제적 곤궁을 어떻게 개선할지가 지금 일본의 최대 과제가 됐다.

아베노믹스, '낙수효과'는 없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지난달 자민당 총재선거 당시부터 ‘새로운 자본주의’를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다. 총리 취임 후엔 각료 및 전문가로 구성된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본부’를 만들었다.

‘새로운’이란 표현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 시대부터 이어져 온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부터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일본 언론들은 해석한다. 동시에 2012년 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2차 내각부터 시작된 경제정책 ‘아베노믹스’가 일본 경제에 어느 정도 활기를 불어넣었음에도 대다수 국민의 소득을 증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격차를 확대했다는 평가에서 출발한다.

‘아베노믹스’ 8년 사이에.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아베노믹스’ 8년 사이에.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실제 아베노믹스는 대규모 금융완화와 재정지출 확대, 공격적인 성장전략이라는 ‘세 개의 화살’로 주가 상승, 기업 이윤 확대 등 표면적인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고소득층이나 대기업이 거둔 경제적 과실이 소비와 투자를 늘려 저소득층까지 윤택하게 만드는 ‘낙수효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기업들은 이윤을 내부유보금으로 쌓아놓았을 뿐 노동자에게 나눠주지 않았고, 일본인의 실질 임금은 사실상 감소했다.

이런 ‘대기업-중소기업’ ‘부유층-빈곤층’ 간의 격차 해소가 기시다 정권 경제 정책의 핵심이다. 대기업의 하청기업에 대한 분배 강화, 임금 인상 기업에 대한 혜택, 육아 가구에 교육비·주거비 지원 강화 등을 내세웠다. 김명중 닛세이 기초연구소 주임연구원은 “아베노믹스로 대기업들의 실적이 개선됐지만, 한번 임금을 올리면 내릴 수 없는 구조에서 기업들이 임직원의 임금 인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서 “이번 자민당의 공약을 보면 사실상 아베노믹스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해석했다.

'1억 총중류사회' 신화 깨진 지 오래

한편 입헌민주당·공산당 등 야당은 아베노믹스를 명백한 ‘실패작’으로 평가한다. 아베노믹스의 가장 큰 성과로 거론되는 고용문제 개선의 경우도 결국 비정규직을 양산해 노동시장의 격차만 심화했다는 평가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2013년~2019년 7년간 일본에서 447만 건의 신규고용이 발생했는데, 이 중 비정규직이 254만 건으로 전체의 56.8%였다. 아베 총리가 내세운 ‘1억 총활약’ 방침에 따라 여성 비정규직이 증가했고, 정년 연장 정책으로 퇴직자 대다수가 비정규직으로 재고용됐다.

일본 주요 정당 경제공약.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일본 주요 정당 경제공약.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국제상학부 교수는 “비정규직이라도 일자리가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코로나19가 닥치면서 비정규직 상당수가 직장을 잃었고, 아베노믹스 고용 정책의 허점이 드러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아베 집권 기간 중 대졸자들의 취업이 크게 개선된 것 역시 일종의 ‘착시 효과’란 분석이 나온다. 김명중 연구원은 “2011~2013년 사이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団塊) 세대’ 330만 명이 은퇴해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갔다. 이런 노동시장 구조 변화에 아베노믹스가 올라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모든 국민이 중산층”이라는 ‘1억 총중류사회’의 신화는 깨진 지 오래다. 일본의 빈곤율은 주요 7개국(G7) 가운데 미국 다음으로 높고, ‘불평등 지수’로 불리는 지니계수 역시 코로나19 이전인 2018년에 이미 0.334였다. 이는 ‘격차가 크다’를 의미하는 0.35에 근접한 수치다. 자민당은 ‘두꺼운 중산층’을, 입헌민주당은 ‘1억 총중류사회의 부활’을 들고나온 것은 격차 문제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반영한다.

"퍼주기 경쟁에 재정 파탄 날 것"

문제는 저마다 분배 정책을 내세우면서도 재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는 점이다. 기시다 총리는 당초 현재 20%인 금융소득세를 소득에 따라 차등 적용하는 정책을 발표했으나 주가 하락 등 시장에서 반감이 나타나자 금세 철회했다. 분배를 중심 공약으로 내세운 다른 정당들도 오히려 “현재 10%인 소비세를 5%로 낮추자” 등 증세보다 감세를 내세우고 있다.

결국 재원은 국채 발행을 통한 재정 확대다.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 채무는 올해 12월 추산 1212조엔(1경 2523조원)으로, GDP의 217%에 달한다. 주요 국가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높다. 일본 재무성의 야노 고지(矢野康治) 사무차관은 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에 기고문을 실어 “선거 국면 정치권의 퍼주기 전쟁이 일본의 국가 재정을 파탄 낼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재원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기시다 정권의 분배 정책이란 결국 아베가 하려다 실패한 내용을 답습하는 데 그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기적으로 부의 배분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구체안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정부 사회보장심의회 위원인 미야모토 다로(宮本太郎) 주오대 교수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분배 없이는 성장도 없다’는 건 말장난과 같은 애매한 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