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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대통령 찍던 그가 꽃에 빠진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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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문화팀장

이지영 문화팀장

“활짝 핀 꽃보다 잎을 떨구는 꽃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씨앗을 잉태하고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웠다. 지는 순간까지 존재 자체가 화양연화구나….”

45년 경력 사진작가 박상훈(69)의 여덟 번째 개인전은 꽃 사진으로 채워졌다. 오는 31일까지 서울 신사동 갤러리나우에서 열리는 ‘화양연화’. 박상훈이 자신의 집 근처 봉은사와 도산공원 등에서 찍은 꽃 사진을 전시하는 자리다.

박상훈 꽃 사진 전시회
김대중부터 박근혜까지
대통령 사진 찍은 작가
“존재 자체가 화양연화”

사진작가 박상훈이 서울 갤러리나우에서 자신의 꽃 사진을 배경으로 서 있다. 아래 사진은 그가 찍은 대통령 사진들. 선거 포스터 등에 쓰였다. [사진 박상훈]

사진작가 박상훈이 서울 갤러리나우에서 자신의 꽃 사진을 배경으로 서 있다. 아래 사진은 그가 찍은 대통령 사진들. 선거 포스터 등에 쓰였다. [사진 박상훈]

중앙대 사진학과 출신인 박상훈은 인물 사진, 풍경 사진으로 명성을 얻었다. 광고 사진으로도 이름을 날리며 뉴욕 페스티벌 금상(1994), 칸 국제광고제 금사자상(1997) 등을 수상했고, 대통령 사진을 연이어 찍으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노르웨이 오슬로 노벨평화센터에 영구보존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과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선 포스터 사진, 재임 기간 관공서에 걸렸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식 사진 등을 모두 그가 찍었다.

소속 당에 상관없이 정치권에서 그를 찾은 이유는 그의 사진이 단순히 예쁘고 멋지게 보이는 데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인물 사진 작업은 “그 사람의 특징이 담긴 표정을 잡아내 그의 본질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를테면 제16대 대선 당시 50대 중반 ‘젊은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을 찍으면서 흰머리와 굵은 주름, 부르튼 입술 등을 그대로 살렸고, 그런 소탈한 모습이 도리어 유권자의 마음을 샀다는 평을 들었다.

이런 그가 꽃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개인적인 아픔이었다. “2016년 아주 가깝고 소중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황망한 이별 뒤의 상실감에 너무 힘들었다. 심리적으로 허우적거릴 때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꽃이 눈에 들어왔다.”

경이로웠다. 처음엔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이 경이로웠고, 곧이어 그 꽃을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에게 꽃은 강인한 존재로 다가왔다. 연약해 보이는 외양에서 엄청난 카리스마가 보였다. 그는 꽃 사진도 멋져 보이도록 치장하지 않았다. 벌레가 먹은 연꽃, 꽃잎이 반쯤은 떨어져 나간 붓꽃 등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꽃과 벌레들이 안간힘을 쏟으며 살아가는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충실한 생명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렇게 꽃 사진에 빠져든 사이 마음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갔다.

박상훈이 찍은 대통령 사진들. 선거 포스터 등에 쓰였다. [사진 박상훈]

박상훈이 찍은 대통령 사진들. 선거 포스터 등에 쓰였다. [사진 박상훈]

꽃은 너무나 흔한 피사체다.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김진호)란 노래가 나왔을 만큼, 너도나도 손쉽게 찍어 올린다. 그래서 꽃은 사진계에서 ‘아마추어의 영역’으로 밀려났고, 프로 작가들에게 오히려 까다로운 소재가 됐다. 누구나 예쁘게 찍을 수 있는 꽃을 그저 예쁘게 찍는 것만으론 별다른 감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역시 꽃 사진을 찍은 후 예술작품으로 내놓기까지 3∼4년의 숙성 시간이 필요했다. “한 발 더 나가야 하는데 더 내디디면 떨어질 것 같은, 백척간두에 선 심정이었다”던 그가 찾아낸 돌파구는 이슬이었다. 꽃과 이슬. 그 상투적인 조합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이라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구현해냈다.

후반 작업 과정은 이랬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꽃 사진을 스마트폰 화면에 띄워두고 그 위에 주사기로 물을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그 물방울을 다시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뒤 픽셀이 알록달록 드러나도록 확대한다. 그렇게 확대한 물방울 사진을 모양대로 잘라 꽃 사진 파일에 얹어 이슬로 표현한다. 이런 생소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슬은 ‘화양연화’로 이름 붙여진 꽃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게 유인하는 역할을 했다. ‘사라지는 존재’라는 생명의 속성을 실물 그대로의 이슬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삶의 마지막을 향해 치달아가는 화양연화의 순간을 더욱 빛나게 했다. 평론가 홍가이의 말대로 “인위적인 디지털 이슬이 사진 작업의 결정적인 화룡점정”이 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작품 22점 중 꽃이 없는 작품 3점을 포함한 것도 생각거리를 더하는 장치다. ‘화양연화-People’로 명명된 이들 작품에는 꽃 대신 멀리 실루엣만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2018년, 꼬박 두 해를 꽃 사진에 빠져있던 그의 눈에 문득 들어온 풍경이었다. 한강 고수부지를 강아지와 함께 걷고 있는 3인 가족, 그라피티 명소인 ‘압구정 토끼굴’을 통과하는 사람들…. 이들을 뷰파인더에 담으며 박상훈은 또 한 번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꽃을 바라볼 때와 똑같은 깨달음이었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순간순간이 화양연화다. 현재를 즐겨라,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