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마음 읽기

가을과 공적(空寂)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어제 새벽에는 얇은 빛으로 떠 있는 달을 보았다. 음력 29일이었으니 아마도 가장 작은 달이었을 것이다. 그 달을 바라보니 반딧불이 불빛이 생각났다. 파란빛이 점멸하는 반딧불이가 마치 하늘에 날고 있는 듯했다.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1912년에 태어난 백석 시인은 자신의 등단작인 시 ‘정주성’에서 그 반딧불이를 보고선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라고 썼다. 훨씬 서늘해진 새벽 공기 속에 서서 새벽녘의 달을 보고 있으니 이젠 정말이지 가을이구나 싶었다.

요즘은 아침에 틈이 나면 꾸지뽕나무 아래로 간다. 집 근처에 커다란 꾸지뽕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요즘은 그 열매가 빨갛게 잘 익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때여서 그걸 주우러 나무 아래로 간다. 가시가 날카롭지만, 그 붉은 열매는 달기만 하다. 빗방울과 햇살과 구름과 바람과 흙이 키워 익힌 우주의 열매이니 어떻게 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보면 내가 꾸지뽕나무 아래로 들어가 그 열매를 줍듯이 가을에는 나무들 아래로 그릇과 바구니를 들고 허리를 굽히면서 들어가 단맛과 신맛의 그 과실을 얻는 때가 아닌가 싶다. 감나무 아래에 가서 붉은 감을 얻어오고, 밤나무 아래에 가서 낱낱의 밤알을 얻어오듯이 말이다. 과실뿐만 아니라 때로는 어린 날의 추억까지도 얻어오니 실로 자연으로부터 얻어오지 않는 것은 없는 듯싶다.

나무 아래에 가 열매를 줍는 아침
바쁜 생활이지만 가을 느끼게 돼
얻음과 잃음을 통해 배우는 해탈

어릴 적 가을날에 자연 속에서 나의 동심도 석류와 함께, 호두 열매 등과 함께 무르익었으니 오늘에 다시 가을의 열매를 얻으면서 깨끗하던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다. 시인 백석은 한 산문에서 “유년(학령전 아동)들의 세계는 고양이와 집토끼를, 헝겊곰과 나무송아지를 동무로 생각하는 세계이다. 유년들의 세계는 셈 세기를 배우는 세계이며 주위 사물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외워보는 세계이다. 유년들의 세계는 유희에서 시작하여 유희에서 끝나는 세계이며 꿈에서 시작하여 꿈에서 끝나는 세계이다”라며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실제로 스스로도 동시나 동화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가 아동문학의 길을 걸어간 이유도 아이들의 마음으로부터 얻어야 할 것이 천진한 웃음과 세상에 대한 궁금점 등등 실로 무궁무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쓴 시 ‘오리들이 운다’에서 “한종일 개울가에/ 엄저오리들이 빡빡/ 새끼오리들이 빡빡.// 오늘도 동무들이 많이 왔다고 빡빡/ 동무들이 모두 낯이 설다고 빡빡.”이라고 쓴 대목을 읽으면 백석 시의 새로운 면모도 느낄 수 있다.

요즘처럼 가을빛이 고운 때에는 생활하느라 피로가 많더라도 계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느새, 가을이구나 싶은 것이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잎이 물들고, 낙엽이 지고, 또 맑은 날과 가을비 내리는 날에는 더 계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얼마 전 가을비가 내리던 밤의 심사를 ‘가을비 속에’라는 졸시를 통해 표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오늘 낮에는 세계가 잘 익은 빛의 금란가사를 입고 있더니 밤에는 검은 비옷을 입고 있네/ 나는 생활하다가 나와서 돌구멍 같은 눈을 뜨고 밤새 빗소리 듣네/ 들고양이에게도 사람에게도 긴 비의 울음/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 생활이 젖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어느 때에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왕성하고 번창하고 기쁘고 좋은 때에는 그 시절을 살고, 쇠하고 쪼그라들고 떨어지고 슬픈 때에는 또 그 시절을 살되 그 모든 때에 마음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애쓰는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벽부’를 지은 문장가인 소동파가 쓴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의 시가 있다.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 같고/ 몸은 마치 매여 있지 않은 배와 같네./ 그대가 평생 한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황주이고 해주이고 담주라고 하겠네.” 황주와 해주와 담주는 소동파의 유배지였다. 이곳에서 힘들게 지냈지만 마음을 닦는 시기로 삼았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마음과 몸이 각각 공적하고, 또 인연을 따라 떠도니 탐착을 버려 자유로움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소동파는 또 다른 시에서 “학 같은 몸매, 서리 같은 수염/ 마음은 이미 재가 되고/ 한아름 푸른 솔은 손수 심은 것이라네”라고도 읊었는데, 그는 늙은 자신의 심경을 재가 된 마음이라고 반복해서 표현했다.

가을의 시간은 아이의 세계와 늙음의 세계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자연의 풍요와 쇠락, 그리고 거둠과 소실이 함께 있으니, 얻을 때에도 배우고 잃을 때에도 배울 일이다. 소동파가 그를 통해 공적의 지혜를 얻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