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1800조 가계빚이 ‘회색 코뿔소’라고?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0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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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호 31면

김창우 사회 에디터

김창우 사회 에디터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고승범 금융위원장, 정은보 금융감독원장. 우리나라의 금융 재정 분야를 책임지는 최고위 공직자들이다. 지난달 30일 이들은 올해 두 번째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내린 결론은 ‘가계부채와의 전쟁’이다. 홍 부총리는 “빠르게 증가한 가계부채 등 ‘회색 코뿔소’와 같은 위험 요인을 확실하고 선제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달 중 구체적인 대책을 공개할 예정이다.

회색 코뿔소(Grey Rhino)는 위험하다는 것은 알지만 무심코 지나쳤다가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는 요소를 뜻한다. 코뿔소와 부딪치면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문제가 터지면 큰 피해를 불러온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발생 확률이 극히 낮아서 예측이나 대비가 어려운 ‘블랙 스완(Black Swan)’과는 대조적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온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검은 백조라면, 우리나라의 가계빚 급증은 회색 코뿔소인 셈이다.

순자산 1경, 주담대 연체율 최저
‘부채와의 전쟁’ 이유부터 설명해야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규모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1388조원에서 올 상반기 1805조원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역시 처음으로 100%를 넘어섰다. 미국(81.5%)·일본(64.3%)·독일(54.6%)보다 높다. 여기에 500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전세보증금까지 합치면 우리나라의 가계빚은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는 내년에 연소득 대비 대출 원금과 이자 상환액을 의미하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40% 이하로 규제할 방침이다. 전세대출 규제 방안도 거론된다.

하지만 시민들이 체감하는 금융시장 분위기는 다르다. 거시경제금융회의가 열리기 이틀 전에 서울 강동구 ‘e편한세상 강일 어반브릿지’ 청약이 이뤄졌다. 1순위만 13만명이 몰려 평균 경쟁률 337.9대1을 기록했다. 서울에서 1순위 청약자가 13만명을 넘은 것은 2000년 이후 처음이다. 특히 174가구를 모집한 전용면적 101㎡ 물량에 8만7681명이 청약해 경쟁률이 503.9대1에 달했다. 전용 101㎡는 분양가가 9억원을 넘어 중도금 대출을 받지 못한다. 인근 아파트의 매매 가격이 15억원을 넘나들고 있어 현행법에 따르면 입주 시 주택담보대출도 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9억원이 넘는 현금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만 8만명이 넘는다는 소리다.

우리나라에 돈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싶은데 따져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가계 및 비영리단체의 순자산은 처음으로 1경원을 넘어섰다. 2019년(9313조원)보다 6.6%(1110조원) 늘었다. 부동산을 포함한 비금융자산이 7983조원이다. 급증한 부채를 빼고도 예금·주식 등 순금융자산이 2485조원에 달한다. 2017년 이후 가계빚이 400조원 늘었지만 비금융자산은 2000조원, 금융자산은 800조원 이상 증가했다. 그 덕분인지 지난 6월 말 현재 가계대출 연체율을 0.17%, 이 가운데서도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0.11%로 사상 최저 수준이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가계빚이 급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원론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정부의 가계대출 조이기는 실패한 부동산 정책의 책임을 대출 증가에 미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집값이 올라 대출 총액이 늘어난 것이 아닌지, 빚보다 자산이 훨씬 많이 늘었는데 괜찮은 것 아닌지, 연체율이 이렇게 낮은데 실제로 위험한 것인지부터 설명해주고 위기를 논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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