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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직격인터뷰

말도 안된다했는데…'오징어게임' 10년만에 빛본 슬픈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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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드라마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글로벌 흥행 1위 드라마 ‘오징어 게임’ 황동혁 감독

이지영 문화팀장

이지영 문화팀장

자고 일어났더니 하루아침에 세계적 스타가 된 경우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50) 감독은 “요즘 전 세계에서 밀려오는 뜨거운 반응에 얼떨떨하다”고 했다.

지난달 17일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23일부터 넷플릭스 ‘전 세계 오늘의 톱10’ 차트에서 줄곧 1위를 지키고 있다. 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29일 현재 집계 대상 국가 83곳 중 80개국에서 1위다. 랭킹 포인트도 최근 1주일 동안 770→788→811→820→822→824→826로 계속 높아지고 있다. “‘오징어 게임’이 역대 가장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이 될 수 있는 기회”라는 넷플릭스 공동 CEO 테드 서랜도스의 전망이 들어맞을 가능성이 크다.

13년 전 첫 구상, 사회 더 살벌해져
편법·꼼수 처벌 않는 현실 풍자극
루저들 헌신 덕에 여기까지 온 것
극중 주인공처럼 한때 대출로 생활

“‘오징어 게임’이 평생 훈장이자 부담으로 따라다닐 것 같다”는 황 감독을 지난 28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그는 서울대 신문학과 출신으로 미국 남캘리포니아대(USC)에서 영화제작 석사 과정(MFA)을 마친 뒤 2007년 해외입양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마이 파더’로 데뷔했다. 청각장애아 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진 성폭력을 고발한 ‘도가니’(2011), 나문희·심은경 주연의 코미디 ‘수상한 그녀’(2014), 김훈 소설 원작의 ‘남한산성’(2017) 등을 차례로 선보이며 흥행감독 반열에 올랐다. 삶의 막다른 곳에 다다른 사람들이 상금 456억원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에 뛰어드는 ‘오징어 게임’은 그가 처음으로 연출한 드라마다. (※이 인터뷰에는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다 보고 난 뒤에 오는 공허감 노려

“처음부터 글로벌 마켓을 목표로 했다”는 ‘오징어 게임’ 황동혁 감독. “한국 사회의 마이너리티로서 세대와 계층을 대표할 만한 보편적 인물들을 작품 속에 집어넣었다”고 했다. [사진 넷플릭스]

“처음부터 글로벌 마켓을 목표로 했다”는 ‘오징어 게임’ 황동혁 감독. “한국 사회의 마이너리티로서 세대와 계층을 대표할 만한 보편적 인물들을 작품 속에 집어넣었다”고 했다. [사진 넷플릭스]

지구촌 시청자를 매료시킨 요인이 뭘까.
“일단 게임 자체의 매력이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있도록 만들어준 ‘재미’라는 측면이다. ‘오징어 게임’은 게임의 재미에 빠져들게 하면서 언뜻언뜻 자신을 감정이입하게 한다. 다 보고 나면 남게 되는 알 수 없는 공허함도 있고. 그게 내가 의도했던 것이기도 하다. 재미있게 보고 난 뒤에 씁쓸함과 생각거리가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임에서 승자가 나와서 손뼉 치고 끝나는 ‘헝거게임’ 류의 작품은 아니니까, 사람들이 뭔가 새로워하고 공감하면서 계속 말이 퍼지는 것 같다.”
기존 게임 장르물과 뭐가 다른가.
“다른 게임물들은 하나의 영웅을 내세워 위너가 되는 과정을 다룬다. 천재 같은 주인공이 게임을 풀어내며 진행된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에선 어느 누구도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기훈(이정재)도 남의 도움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통과한다. ‘징검다리 게임’이 이 작품의 주제와 가장 닿아있는 상징적인 게임이다. 먼저 가는 사람이 길을 터줘야 뒷사람이 갈 수 있다. 이 게임에서 살아남은 기훈과 상우(박해수)가 말다툼을 한다. 상우는 자신이 죽도록 노력해서 이겼다고 하지만, 기훈은 ‘죽은 유리공 덕에 다리 끝까지 살아서 간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루저의 헌신과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승자는 결국 패자들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것이고, 그 패자를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오징어 게임’은 루저들의 얘기다.”
루저의 이야기에 왜 이토록 몰입할까.
“10년 전 월가에서 ‘99%’의 시위가 있었다. 1%가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99%에 속하는 약자라고 생각하며 삶의 고단함을 느끼고 있다. ‘오징어 게임’ 참가자 입장에서 그 게임을 따라가며 누군가를 응원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게 된 거 같다. 어떤 영웅도 없는 이야기여서 사람들이 더 쉽게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현실감 있다는 말이 더 서글퍼

황 감독이 ‘오징어 게임’을 처음 구상하고 각본을 쓴 건 2008년이다. 당시 그가 ‘오징어 게임’을 영화로 만들어보려고 했을 때 어떤 제작자도 나서지 않았다. 낯설고 난해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황 감독은 “10여 년 만에 이 말도 안 되는 살벌한 서바이벌이 어울리는 세상이 됐다”며 “현실감 있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 것이 서글프고 슬프다”고 했다.

세상이 더 나빠진 건가.
“사람들이 삶이 더 고단하고 힘들어졌다고 생각하면서 더 일확천금을 노리는 세상이 됐다. 가상화폐 투자와 주식 광풍, 부동산 투기 등은 한국만이 아닌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부의 불균형이 더 심해졌다. 금융·부동산 자산의 가치가 뛰어오르면서 가진 사람이 훨씬 더 많이 가지게 됐고, 빈부 격차가 훨씬 더 벌어졌다. ‘오징어 게임’에 더 공감하기 쉬운 세상이 된 것이다.”
2008년 구상했을 때 어떤 상황이었나.
“데뷔작 ‘마이 파더’가 좋은 평을 받았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제작비가 38억원 정도였는데, 관객이 100만 정도 들었다. 180만 명은 봐야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었다. 2008년에 영화를 하나 준비했었는데 끝내 투자를 못 받았고,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어머니·할머니와 함께 살던 때였다. 대출을 받고 마이너스 통장에 의지해야 생활비가 해결되는 상황까지 몰렸다. ‘오징어 게임’ 기훈과 비슷한 경제적·심리적 상태였다. 당시 만화에 빠져있었는데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서 빚을 진 사람들이 거액의 상금이 걸린 게임을 하는 걸 보고 ‘나라도 이런 게임이 있으면 참가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감정이입을 깊게 했다. 그걸 내 방식대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이어져 ‘오징어 게임’이 나왔다.”

작은 승리에 취하면 ‘경마장 말’에 그쳐

‘오징어 게임’ 안에는 뛰어넘지 못하는 계급의 한계가 존재한다. 승자든 패자든 모두 VIP계급의 놀잇감이었다.
“기훈이 마지막에 비행기를 타지 않고 하는 말 ‘난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 그래서 궁금해. 너희들이 누군지,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에 그 의미가 녹아있다. 대장 프론트맨(이병헌)이 리무진 안에서 기훈에게 ‘당신들은 말, 경마장의 말’이라고 한다. 비록 게임장 내 경쟁에서 이기고 위너가 됐지만, 더 큰 게임에서는 한 마리 말일 뿐이다. 그런 자각 없이 작은 승리에 도취해 살아가면 말 신세에서 못 벗어난다. 이 사회를 굴리는 극소수의 권력·재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들이 어떤 시스템으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기훈을 통해 하고 싶었다. 이 판을 누가 만드는지, 왜 만드는지 궁금해하고 그게 만약 불평등한 게임이라면 분노해야 한다. 이에 대해 자각하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다.”
의사(유성주)를 등장시킨 에피소드가 인상적이다. 장기 적출을 도와주고 게임 힌트를 몰래 얻었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처형하면서 “평등의 원칙을 깼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무엇을 말하려는 장치인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오징어 게임’ 속 게임장보다 더 못한 곳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었다. 말하자면 역설적 장치다. 게임장 내에는 꼼수와 반칙을 응징하는 ‘형식적 평등’이라도 있지만, 이 세상에선 각종 편법과 찬스로 얻는 기회와 이익이 처벌되지 않고 있다. 그런 것을 꼬집고 싶었다.”

민주주의 다수결 제도에 질문

‘오징어 게임’의 기훈(이정재). “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기훈의 각성이 강한 여운을 남긴다.

‘오징어 게임’의 기훈(이정재). “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기훈의 각성이 강한 여운을 남긴다.

게임 참가자 과반수가 찬성하면 게임을 중단할 수 있는 ‘다수결’ 제도를 집어넣었다. 어떤 의미인가.
“일단 참가자들을 게임장 밖으로 한 번 나가게 하려고 다수결 원칙을 넣었다. 그리고 ‘다수결만으로 무엇이 해결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이고, 선거는 결국 다수결 아니냐. 그런데 다수결로 뽑힌 사람들이 또 잘못을 하고, 또 갈아엎어야 한다고 하는 게 반복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상징적 은유로 담아봤다.”
데뷔작 ‘마이 파더’부터 반향이 컸던 ‘도가니’, 그리고 ‘오징어 게임’까지 현실 사회의 모순을 다룬 작품이 많다. 사회적 이슈를 다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나.
“1990년 대학에 들어갔을 때 80년대 학번들이 선배로 있어서 학교 분위기 자체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과 남학생 절반은 시위에 나가 화염병을 던지는 시절이었고,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92년부터는 신세대·X세대가 등장하면서 문화적인 붐이 일어났다. 우리는 낀세대로, 사회적 모순에 대한 관심을 갖고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동시에 문화적인 자유로움과 개방성의 수혜도 입었다. 아마 내 작품에 그 두 가지가 다 섞여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됐다. 흥행 대박에 따른 인센티브를 받지 못하는데, 아쉬움은 없나.
“알고서 계약서에 사인한 거다. 2018년 넷플릭스에 직접 제안을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영화보다 드라마 시리즈로 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예전에 써놓은 영화 대본을 보여줬다. 넷플릭스가 없었으면 어디서 이런 예산으로 이렇게 수위 높은 작품을 만들었겠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