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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멸망시킨 ‘빵과 서커스’…포퓰리즘에 포위된 대선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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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대중조작과 전체주의

토마 쿠튀르(1815~1879)가 캔버스에 그린 ‘타락한 로마인들(1847)’. ‘빵과 서커스’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쇠락해 가는 로마를 화폭에 담았다. [사진 오르세미술관·위키피디아]

토마 쿠튀르(1815~1879)가 캔버스에 그린 ‘타락한 로마인들(1847)’. ‘빵과 서커스’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쇠락해 가는 로마를 화폭에 담았다. [사진 오르세미술관·위키피디아]

여야 대선 후보들의 포퓰리즘 공약이 도를 넘고 있다.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내세운 기본 소득·주택·대출 등을 실현하려면 1000조원대의 돈이 든다. 올해 정부 예산안(558조원)의 2배가량이다. 이낙연 후보는 서울공항 이전 후 신도시 건설을, 추미애 후보는 생애 세 번의 안식년 동안 매월 100만원 지급을 약속했다.

현실성이 부족한 공약을 내세우긴 야당도 마찬가지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청년·신혼부부에 원가·반값 주택 50만호를 공약했다. 홍준표 후보는 쿼터 아파트까지 내걸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을 4분의 1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여야 모두 내부에서 “나랏돈 물 쓰듯 쓰기 대회에 나왔다”(박용진)거나 “허황된 포퓰리즘”(유승민)이란 비판이 나온다.

청년·아이 미래 훔치는 선심공약
“무상공약은 진보의 탈 쓴 게으름”
“정치쇼가 국민 어리석게 만들어”
포퓰리즘 다음 단계는 전체주의

허경영 국가혁명당 대선후보마저 일침을 놨다. “(나를) 사기꾼 코미디언이라 조롱하더니 이젠 여야 모든 정치인이 따라한다”고 말이다. 허 후보의 공약만큼 여야 유력 주자들의 공약도 허황돼 보인다. 갈수록 심화되는 포퓰리즘의 유혹, 이래도 괜찮은 걸까.

원조 퍼주기 ‘빵과 서커스’

고대 폼페이의 유적지 펠릭스 영지에서 발견된 프레스코 벽화.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도시와 함께 화산재로 뒤덮인 펠릭스 영지는 1755년 발굴됐다. [사진 나폴리박물관·위키피디아]

고대 폼페이의 유적지 펠릭스 영지에서 발견된 프레스코 벽화.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도시와 함께 화산재로 뒤덮인 펠릭스 영지는 1755년 발굴됐다. [사진 나폴리박물관·위키피디아]

포에니 전쟁에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는 거대 제국으로 발돋움했지만, 시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로마군의 주력은 자작농이었는데, 전쟁 기간 농사를 짓지 못해 놀리는 토지가 많았다. 남성들이 파병 간 사이 여성·아이들은 땅을 담보로 곡식을 구했고, 심지어 헐값에 넘겼다.

이때 땅을 사들여 거대한 부를 축적한 이들이 세넥스(senex)다. 세넥스는 노인을 뜻하는 단어지만, 돈 많은 귀족을 일컫는 표현이 됐다. 원로원(senatus)의 어원이다. BC 123년 토지 독점과 양극화가 심해지자 집정관 그라쿠스 형제는 개혁안을 내놨다. 땅 소유를 제한하고 국가가 곡물값을 조절하기 시작했다(『빵과 서커스』).

큐라 아노나(Cura Annona)라고 불린 이 제도 덕분에 빈곤층은 매달 약 30㎏ 이하의 곡물을 절반 가격에 샀다. 그러나 식량 대부분을 식민지에서 조달했던 로마는 해적의 침입과 기상 악화 등으로 공급이 불안정했다. 인구 급증으로 가격도 폭등했다. 그러자 BC 58년 클로디우스 호민관은 10% 안팎의 하위층에게 무상 배급(클로디우스 곡물법·Lex Clodia Frumentaria)을 시작했다(「로마의 곡물 문제와 정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상 배급 대상은 로마 시민의 절반가량으로 늘었다.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권력자들의 매표 행위 탓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제정(帝政) 로마도 정통성 없는 황제들이 선심성 정책을 남발했다. 곡물 대신 직접 빵을 주더니, 나중엔 와인·돼지고기까지 얹어줬다. 당대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정치·군사 모든 영역에서 권위의 원천이었던 시민들이 이제는 빵과 서커스만 기다린다”고 꼬집었다(『풍자』).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 정책은 시민들을 우민화시켜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이다. 오락거리를 제공해 국민을 무지하게 만드는 영화 ‘헝거게임’도 로마를 모티브로 했다. 가상국가 ‘판엠(Panem)’에서 매년 13개 지역의 대표 1명씩 모여 마지막 생존자가 나올 때까지 싸움을 벌인다. 승리한 지역엔 더 많은 식량이 배급되기 때문에 국민들은 ‘살인게임’에 열광한다.

로마도 빵과 함께 검투사 경기와 전차경주 등 각종 볼거리를 제공하며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먹고 즐기는데 필요한 물자와 노예는 식민지에서 들여왔다. 전쟁은 로마의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는 비즈니스였다. 그러나 3세기 이후 제국의 팽창이 멈추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훈·고트·반달 등 이민족의 부흥으로 식민지 지배력을 잃으면서 476년 멸망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제국의 확대는 파멸의 원인이 됐다. 억지로 세운 기둥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로마라는) 거대한 건축물은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졌다”고 평가했다(『로마제국 쇠망사』). 로마 멸망의 근본 원인은 탐욕스런 권력자와 이성적 판단력을 잃어버린 시민들 탓이라는 이야기다.

국가 지도자로서 갈라치기는 부적절

포퓰리즘으로 망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물가 상승률이 연간 2500%인 베네수엘라, 국가부도만 9번 낸 아르헨티나는 무분별한 퍼주기로 국가 위기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정치가들이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포퓰리즘의 효과가 즉각적인 반면, 비용 청구서는 늦게 날아오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청년들과 아이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는 것과 같다.

박용진

박용진

여당의 박용진 후보는 지난달 25일 광주·전남 경선 연설에서 “관성처럼 정책에 ‘무상’ 시리즈를 붙이는 건 진보의 탈을 쓴 게으름”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오늘의 번영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설이 끝나고 박 의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왜 포퓰리즘을 비판하나.
“오늘 당장 박수받을 이야기만 하면 얼마나 편하겠나.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지만, 미래의 30~40년을 설계하고 책임지는 자리다. 인기를 얻기 위해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포퓰리즘은 청년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울 뿐이다.”
진보는 보편적 복지를 강조한다.
“여권은 10년 전 무상급식 논쟁에서의 짜릿한 승리를 잊어야 한다. 퍼주는 것만이 진보가 아니다. 복지와 포퓰리즘의 경계는 국가재정이 지속 가능한가이다. 제도를 만들 때 재정적 뒷받침이 있는지, 그 제도가 계속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상과 보편 시리즈만 내세우면 무책임하다.”
상위 10%의 세금으로 90%가 혜택을 받게 된다는 국토보유세(이재명)는 어떤가.
“부자와 아닌 자 등으로 갈라치기 하는 것은 국가 지도자로서 부적절하다. 어느 한 집단을 적대시하는 정책은 민주주의에 어긋난다. 집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 더 좋은 집을 갖고 싶은 욕구를 죄악시해선 안 된다. 시장과 대결하려는 생각이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불렀다.”

포퓰리즘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건드려 이성적 사고를 가로막는다.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고 다수의 생각이라며 밀어붙인다. 이때 극좌는 부자의 것을 빼앗아 빈자에게 나눠준다 하고, 극우는 민족주의(또는 인종주의)를 내세워 이민자·외국인 등을 차별하고 제노포비아를 부추긴다. 앞선 대표적인 예가 후안 페론(아르헨티나)과 우고 차베스(베네수엘라)이며, 후자는 도널드 트럼프(미국)와 마린 르 펜(프랑스)이다.

극좌·극우 포퓰리즘 모두 가진 현 정권

윤희숙

윤희숙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극좌·극우 성향을 모두 보인다. 선거 때 돈을 풀며 각종 퍼주기를 일삼고 틈만 나면 부자와 빈자를 나눠 갈라치기 한다. 갈등 사안이 생기면 토착왜구 프레임을 씌워 반일 민족주의를 자극한다. 우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며 북한 바라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의 분석이다.

현 정권은 왜 민족주의를 내세울까.
“집권세력은 1980년대 반미(NL)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노동자 기반의 진보 의제를 실천해온 서구 좌파들과 동떨어져 있다. 서구의 이민자 이슈 대신 친북·반일의 형태로 민족주의를 활용한다.”
보수 정당도 각종 퍼주기 공약에 동참한다.
“포퓰리즘은 재정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으로 나뉜다. 재정적인 게 퍼주기이고, 정치적인 건 진영 논리다. 국민 전체(population)를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지지층만 바라본다. 자신의 지지기반에 퍼주기를 하는 건 좌우 모두 마찬가지다. 다만 타깃이 누구냐에 따라 남미는 저소득층을, 서구는 전통적인 백인 유권자를 노린다.”
포퓰리즘은 왜 민주주의를 위협하나.
“개인의 자유와 독립성을 키우는 게 자유민주주의다. 포퓰리즘은 정반대다. 포퓰리스트는 개인의 지성을 북돋우는 대신 욕망과 분노의 감정을 건드려 대중을 움직인다. 탁현민 류의 정치 쇼가 대표적이다. 개인을 어리석게 만드는 일은 자연스럽게 대중조작과 전체주의로 이어진다.”

최초의 근대적 독재자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국민이 선거를 통해 뽑은 첫 대통령이었다. 비현실적 공약을 남발하고 실체 없는 기대를 부추겨 권력을 장악했다. ‘인간 아편’이란 별명처럼 뛰어난 대중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정적을 탄압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며 독재의 길로 갔다. 끝내 국민투표로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무솔리니의 파시즘도 시작은 모두 포퓰리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