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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나홀로 덕수궁’도 좋은 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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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지난 15일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박서보(90) 화백의 개인전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피가 뜨거웠던 젊은 시절 수행의 도구로 그림을 그렸다”면서 “내가 달항아리에 미치는 이유는 흙, 도공, 물레가 하나가 돼 엄청난 우주를 만들고, 보는 사람마다 안아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단색화의 거장’이라 불리는 그가 단색화의 요체를 설명하며 한 얘기였습니다. 박 화백은 실제로 달항아리 애호가로도 유명한데요, 그는 자신이 그림으로 도달하고 싶은 경지를 달항아리에 비유해 표현해왔습니다. 흙과 물레와 합일된 작가의 몰입이 이뤄낸 고졸(古拙)한 멋과 아름다움의 경지, 그리고 고요한 울림.

마침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선 달항아리와 청자 등 문화재와 함께 김환기·박서보·윤형근 등 한국 대표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나란히 배치한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DNA: 한국 미술 어제와 오늘’(10월 10일까지)인데요, 이 전시를 보고 나면 그동안 우리 근현대 미술사에 달항아리에 ‘미친’ 작가가 한둘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상봉의 ‘라일락’, 1975, 캔버스에 유채, 53X65.1㎝,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도상봉의 ‘라일락’, 1975, 캔버스에 유채, 53X65.1㎝,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도상봉(1902~1977)과 김환기(1913~1974)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도상봉은 자신의 호를 도천(陶泉·‘도자기의 샘’이라는 뜻)으로 지을 만큼 도자기를 사랑해 1933년 자신이 소장한 도자기만으로 ‘이조도자전’을 열었다죠. 이 전시에선 도상봉의 ‘라일락’ 등 대표작뿐만 아니라 그가 작품을 그리는 데 실제로 참조한 도자기도 여러 점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달항아리의 찌그러진 형태에서 매력을 느낀다.” 지난 20일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한국실을 찾았던 방탄소년단(BTS) 리더 RM(김남준)이 달항아리 앞에서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RM에 앞서 찌그러진 백자를 특별히 사랑한 이가 바로 김환기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지필묵 상인이자 고미술상을 겸하던 홍기대(1921~2019) 선생의 기록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엔 “(김환기는)비싼 것을 찾지도 소장하지도 않았으나 찌그러진 것을 좋아하는 그만의 취향이 있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김환기가 그린 1954년 작 ‘호월(壺月)’(159.5X95㎝, 캔버스에 유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도 여기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미(美)란 무엇인가. 이 전시는 그동안 수많은 학자와 작가들이 수없이 던진 이 질문을 오늘 우리로 하여금 다시 마주하게 합니다. 사진으로만 보는 달항아리나 김환기 그림은 이제 그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만큼 귀한 게 있을까요. ‘나홀로 덕수궁’이라도 좋습니다. 지금 뜰에선 흥미진진한 야외전시 ‘덕수궁 프로젝트’도 열리고 있습니다. 지금 공간 전체가 거대한 미술관으로 변신한 덕수궁을 만끽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