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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나우 인 재팬

日 고노 총리되면 수출규제 풀릴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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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총리 재임 중엔 참배하지 않겠다.”(고노)
“시기와 상황을 고려해 참배하고 싶다.”(기시다) 
“하겠다.”(다카이치)
“개인적으로는 참배하지만, 공직자로서는 하지 않는다.”(노다)

지난 24일, 온라인으로 진행된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 후보 토론회에서 “총리가 되면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네 후보의 대답이다. 야스쿠니신사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곳으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한국과 중국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안이다. 과거사와 주변국 외교에 대한 후보들 간의 인식 차이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18일 일본기자협회가 주최하는 토론회에 참석한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자들. 왼쪽부터 고노 다로 행정개혁담당상, 기시다 후미오 전 자민당 정조회장,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상, 노다 세이코 자민당 간사장 대행. [EPA=연합뉴스]

지난 18일 일본기자협회가 주최하는 토론회에 참석한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자들. 왼쪽부터 고노 다로 행정개혁담당상, 기시다 후미오 전 자민당 정조회장,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상, 노다 세이코 자민당 간사장 대행. [EPA=연합뉴스]

오는 29일 사실상 일본의 차기 총리를 선출하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후보인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담당상,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총무상,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자민당 간사장 대행 등 네 후보의 외교안보 정책에 관심이 쏠린다. 특히 강제징용ㆍ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양국 관계가 ‘사상 최악’으로 불릴 만큼 악화한 상황에서, 일본 총리 교체를 변화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고노 “수출규제 그만둘 수 있어”

이번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은 고노 담당상과 기시다 전 정조회장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정권에서 나란히 외무상을 지냈다. 기시다는 2015년 한ㆍ일 ‘위안부 합의’ 때 외무상으로 직접 발표 자리에 섰고, 고노는 2019년 7월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빌미로 수출규제 보복을 단행했을 때 외무상이었다. 당시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외무성으로 초치한 자리에서 남 대사의 발언을 끊으며 “극히 무례하다”고 말해 외교 결례 논란에 휩싸였다.

자민당 총재후보 대(對)한반도 정책.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자민당 총재후보 대(對)한반도 정책.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런 만큼 강제징용ㆍ위안부 문제 등으로 인한 최근의 양국 갈등에 대해서는 아베-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정부와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에 서 있다. 기시다는 24일 토론에서도 이 사안과 관련해 “한국에 국제 합의, 국제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것”이라면서 “공은 한국에 있다”고 말했다. 고노도 지난 18일 열린 일본기자클럽 주최 토론회에서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한국 쪽은 사법 판단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역시 (1965년의 한ㆍ일) 기본조약에 반하는 것으로, 한국 측이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고노 담당상은 수출규제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전향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18일 토론회에서 “무역 문제에 있어선 양국에 불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상황이 해소됐다면, 규제도 필요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과거사와 경제 문제는 분리해 접근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다카이치 전 총무상과 노다 대행도 강제징용ㆍ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한국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다 대행은 “한국이 과거에 붙잡혀있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대화에 응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노-기시다, 근간은 아베와 달라

한·일 관계 현안에 관한 대응엔 큰 차이가 없지만, 고노와 기시다의 경우 아시아 외교를 바라보는 근본 인식에 있어선 아베 전 총리와 차이를 보인다는 분석도 있다. 기시다는 자민당 내 ‘보수 본류’로 불리는 ‘고치카이(宏池会)’ 파벌의 계승자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ㆍ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 총리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고치카이는 전통적으로 한국ㆍ중국 등 주변국 외교를 중시해왔으며, 미야자와 전 총리는 재임 중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사죄를 표명하기도 했다.

2019년 5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 참석차 파리를 방문한 고노 다로 당시 일본 외무상(왼쪽)이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과 악수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19년 5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 참석차 파리를 방문한 고노 다로 당시 일본 외무상(왼쪽)이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과 악수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고노 담당상 역시 아시아 근린국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외무상 재임 당시에도 한·일 관계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전문가 회의를 여러 차례 열었다고 한다. 당시 회합에 참석했던 한 언론인은 “고노 외무상이 여러 번 회의에 끝까지 남아 참가자들의 의견을 경청했다”면서 “한·일 관계 개선에 관심이 많은 정치인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아베 전 총리로 대표되는 자민당 내 보수우파의 이념을 잇는 건 다카이치 전 총무상이다. 당선 가능성은 작지만 노다 대행의 경우 ‘한일여성친선협회’ 회장을 맡고 있고, 남편은 일본에 귀화한 재일동포 3세로 한국과 감정적 거리가 가까운 편이다.

“양국 갈등 복합적, 변화 기대 힘들다”

전문가들은 후보들의 개인적 가치관과는 별도로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현재 한·일 관계에 극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망한다. 니시노 준야(西野純也) 게이오대 교수는 “자민당 내 정치 역학이나 일본 국내 여론 등을 고려했을 때 총리가 바뀐다 해도 양국 관계에 가시적인 변화가 나타나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가을 중의원 선거,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여론을 자극할 수 있는 한·일 관계는 ‘관리’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니시노 교수는 또 “한국이 대선 국면에 들어가는 것도 본격적인 협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5년 12월 28일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외무상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5년 12월 28일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외무상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쿠조노 히데키(奥薗秀樹) 시즈오카(静岡)현립대 교수도 “현재 한·일 갈등은 구조적으로 복잡해 누가 총리가 된다 해도 쉽게 돌파구가 생길 것 같지 않다”고 봤다. 새 총리가 한·일 관계에 대한 자신만의 비전을 갖고 있다 해도, 내년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간 후에야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오쿠조노 교수는 “그럼에도 리더가 바뀌는 것은 현재의 좋지 않은 흐름을 바꿀 계기가 될 수 있으므로, 이를 위해 양국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