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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하던 아이가 배꼽 인사, 지구촌 태권도에 반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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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4호 10면

다시 부는 태권도 한류 

미국 버지니아주 MBA MAJEST 태권도장에서 아이들이 송판 격파를 마치고 즐거워하고 있다. 태권도장은 한국식 돌봄교실 역할로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진 최승민]

미국 버지니아주 MBA MAJEST 태권도장에서 아이들이 송판 격파를 마치고 즐거워하고 있다. 태권도장은 한국식 돌봄교실 역할로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진 최승민]

“K팝, K드라마도 놀랍지만 태권도는 내가 경험한 한국 문화 중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다. 한국인들의 정체는 도대체 뭐냐?”

“BTS도 좋아하지만 태권도를 다시 보게 됐다. 펜데믹이 끝나면 한국에 꼭 가보고 싶다.”

미국에서 태권도 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지난 16일 세계태권도연맹(WT·총재 조정원) 산하 태권도 시범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NBC 생방송 ‘아메리카 갓 탤런트’(아갓텔·AGT) 결승전을 치렀다. 아갓텔의 우승 상금은 약 11억원으로 시청자 수 1000만여 명에,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미국 내 최대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시범단은 마치 하늘을 나는듯한 고공 발차기, 절제된 칼군무 등을 선보였다. 미국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인터넷 게시판 등에는 시범단의 놀라운 공연에 찬사가 쏟아졌다. 이날 시범단은 비록 우승을 놓쳤지만 지난 두 달여 간 현지에서는 큰 화제를 모았다.

시리아 난민 캠프 아이들에게도 가르쳐

프로그램의 진행자이자 스포츠 스타 출신인 테리 크루스는 “나는 평생 이런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태권도는 싸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용기, 자신감, 그리고 존경(존중)에 관한 것이다”고 극찬했다. 관객과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것은 시범단의 화려한 격파와 군무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 때문이라는 것이 미국 현지의 반응이다. 이들은 공연이 끝날 즈음 ‘평화는 승리보다 귀하다 (Peace  is more precious  than  Triumph)’라는 글귀가 담긴 현수막을 펼쳤다. 이 글귀는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의 선친이자 경희대 설립자인  고(故) 조영식 박사가 남긴 말이다. 이 글귀는 시범단이 해외 공연 때마다 현지에서 전하는 메시지다. 지난 2018년 6월 바티칸 공연 때도 이를 본 프란치스코 교황이 크게 감동했다는 후문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태권도 시범단이 전하는 이런 정신은 실제 해외 각지에서 벌어지는 활동 속에서 잘 나타난다. 시리아 내 난민 캠프에서 현지 어린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것이 대표적이다. 세계태권도연맹 관계자는 “태권도는 단순한 격투기, 무술을 넘어 평화와 희망을 전달하는 매개체”라며 “전쟁과 재해로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와 청년들에게 꿈을 주는 것이 큰 목적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세계태권도연맹에 가입한 국가는 전 세계 210개국이다. UN 회원국(193개국)보다 많고, 국제축구연맹(FIFA) 회원국(211) 수와 비슷하다. 세계 태권도 수련생은 1억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태권도가 유도나 복싱과 같은 하나의 스포츠 종목 정도로 인식됐다면 현재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는 단순히 기술과 체력 단련 외에 학교 교육을 비롯해 정신과 문화 전파의 매개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 2007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설립된 전미 태권도교육재단은 미주 11개 지역을 중심으로 400개가 넘는 공립학교에 태권도를 정규 교육 과정으로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또 미 전역에 있는 수많은 태권도장에서는 한국형 방과 후 프로그램을 열어 미국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한국과 같은 방과 후 학원 문화가 거의 없는 미국에서 태권도 도장은 일종의 돌봄 교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태권도장에서는 태권도 품새와 격파 등 기술적인 부분 외에도 한국식 배꼽 인사와 같은 예의범절 교육을 반드시 가르친다. 또 아이들의 생일파티를 열어주고, 방과 후 급식제공까지 하고 있어 맞벌이를 하는 미국 학부모들은 “미국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포츠센터”라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멕시코·브라질 등 중남미에서도 인기  

세계태권도연맹(WT) 시범단이 아갓텔에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태권도연맹(WT) 시범단이 아갓텔에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태권도장(MBA MAJEST)을 운영하는 최승민(50) 사범은 “수강생 대부분은 미국 현지인으로 한국인은 1%도 안 된다”며 “아이와 학부모가 함께 듣는 패밀리 클래스도 있어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1997년부터 미국에서 태권도장을 열었다는 최 사범은 “이곳의 태권도장들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픽업하고 태권도 수업이 끝나면 숙제까지 봐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학부모들의 호응도가 상당히 높다”고 했다. 지난해 11월부터는 태권도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을 통해 수학, 컴퓨터 코딩을 가르치는 수업도 새롭게 시작했다. 아이들이 여러 장소로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서 태권도를 비롯해 여러 프로그램을 함께 배울 수 있어 학부모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특히 태권도장에서는 ‘인성교육’을 강조한다. 태권도장에 다닌 지 몇 달 후 아이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학부모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최 사범은 “도장에서는 아이들에게 배꼽 인사를 가르치고, 학교에 가서도 선생님께 배꼽 인사를 하라고 가르친다”며 “어른을 존경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존중하는 태도를 강조하는데 실제로 ‘아이가 집에 와서 부모나 이웃 사람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매사에 산만하던 아이가 차분하고 집중력 높은 아이로 변했다는 태권도 경험담을 인터넷에 올리는 부모들도 있다.

세계태권도연맹(WT) 시범단이 아갓텔에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태권도연맹(WT) 시범단이 아갓텔에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멕시코·브라질 등 중남미에서도 태권도는 인기 스포츠다. 특히 2019년 온두라스는 중남미에서는 처음으로 태권도를 공립 초등학교에서 정규 교육과목으로 채택했다. 현지 15개 공립 초등학교 학생 1800여명은 선택이 아닌 필수 의무 수업으로 주 2회 진행된다. 이곳에선 한국인 사범들에게 교육을 받은 온두라스 현지 지도자들이 태권도를 가르친다고 한다. 온두라스에서 태권도는 축구에 이어 제2의 스포츠로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유럽에서는 스페인이 태권도 한류의 중심국가다. 스페인 갈리시아주에서 태권도장(Han’s Horang-I, 한스호랑이)를 운영 중인 신승한(49)사범은 “스페인에서 태권도 역사는 40년이 넘는다”며 “미국과 같은 (학생) 픽업 시스템은 없지만 이곳에서도 방과 후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태권도장을 선호하는 학부모가 많다”고 했다. 신 사범은 이어 “스페인 학부모들 역시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운 이후 인성 측면에서 많은 긍정적인 변화를 체험했다는 얘기를 한다”고 전했다. 세계태권도연맹 관계자는 “태권도는 이제 단순한 스포츠 종목을 넘어 한국을 더 잘 알고 싶어하고, 또 다른 한국 문화를 체험하려는 한류 전파자의 역할을 세계 각국에서 하고 있다”며 “이는 태권도 종주국으로서 올림픽 성적 이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태권도 한류 개척자 이준구, 미 의원들 모아 놓고 “차렷, 경례”

무하마드 알리에게 발차기 시범을 보이는 이준구(오른쪽) 사범. [중앙포토]

무하마드 알리에게 발차기 시범을 보이는 이준구(오른쪽) 사범. [중앙포토]

미국 등 서구에 태권도를 전파해 최초의 한류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 이는 이준구(Jhoon Rhee, 1932~2018) 사범이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로 불린다. 1957년 11월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텍사스주립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해 태권도 클럽을 결성했다. 이후 1962년에 워싱턴 D.C에 태권도장을 열어 미국 내 태권도 전파를 본격화했다.

당시 강도를 당한 미 연방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태권도를 배우면 강도를 당하지 않는다”라고 설득해 태권도장으로 이끈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가 미 정계에서 유명 인사가 된 것은 1965년부터다. 당시 이 사범은 미 하원에 태권도장을 만들어 300여명의 의원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조 바이든 대통령, 탐 폴리 의원,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치인들이 그의 제자가 됐다. 미 의원들을 모아 놓고 우리 말로 ‘차렷’ ‘경례’를 시키면 그대로 따라 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의 이런 활동은 미 정계 중심으로 뻗어 나갔다. 레이건 대통령 때는 체육·교육특별위원회 고문,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에는 아시아·태평양 정책자문 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앞서 1976년 그는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일에 스포츠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금세기 최고의 무술인 상’에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수상자로 선정됐다. 2000년에는 미국 정부가 선정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하고 유명한 이민자 203인’에 아인슈타인, 에디슨, 키신저 등과 함께 선정됐고,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됐다. 2003년 6월엔 미 의회 의원들의 추천으로 ‘준 리 데이’(이준구의 날) 선포식이 열리기도 했다. 그가 미국에서 태권도를 전파한 지 41년 만의 일이다. 그가 미국인들에게 ‘그랜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이유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는 데도 그의 기여가 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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