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시드니 셸던 소설 중복 출판 극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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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미국의 대중작가인 시드니 셸던의 소설들이 국내 번역물 출판시장에 마구잡이로 쏟아져 갖가지 심각한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78년 한진 출판사가 『깊은 밤 깊은 곳에』(원제 The Other Side of Midnight)를 번역 출판하면서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시드니 셸던의 소설 작품들은 지금은 일부 대형서점에서 따로 독립코너를 마련해야 할 정도로 많은 출판사들이 다투어 책을 내고 있으며 셸던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책은 어느 것이나 준 베스트셀러를 장담해도 좋을 만큼 독자들의 비상한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소개된 셸던의 소설은 10여종을 헤아리고 있는데, 그의 작품 1종 이상을 출판한 출판사가 20여 개사, 아예 시리즈 간행을 표방하고 나선 출판사만도 10여개 사에 이르고 있다.
추리적 수법에 기댄 탄탄한 구성, 극적이고도 속도감 있는 문체, 섹스·사랑·야망·복수 등의 보편적 인간정황을 바닥에 깐 지극히 오락적인 사건전개 등으로 문학성과는 관계없이 독자들을 흡인, 고도의 재미를 안겨줄 수 있다는 점이 셸던 소설의 특징적 매력이자 셀링 포인트.
셸던 소설의 상업성은 잠재시장 규모가 종당 30만∼50만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결코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때문에 같은 작품에 수많은 출판사가 달려들어 낭비적 중복출판을 감행하는 사례들이 일반화되고 있다.
상업성 있는 저작물에 대한 중복 출판은 출판계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버려야할 악폐의 하나로 누누이 지적돼온 것이나 시드니 셸던의 소설작품을 둘러 싼 최근의 중복출판 사례는 출판 윤리나 이성을 현저히 뛰어 넘는 심각한 차원으로까지 발전되고 있어 많은 뜻 있는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다.
예를 들어 셸던의 원작『Master of the Games』는 『게임의 여왕』외에도 『욕망의 승부』 『잠자는 게임』 『게임의 매스터』『케이트가의 게임』 『황금 옷 천사』등 멋대로 우리말 제목을 붙인 번역본들이 함께 나돌고 있으며,『Bloodline』도 『블러드라인』 『혈통』 『화려한 혈통』『찬란한 혈통』 등 같은 작품을 제목만 바꾼 번역본들이 최근까지도 수없이 서점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The Other Side of Midnight』의 경우는 『깊은 밤 깊은 곳에』를 비롯, 『한밤의 저쪽』『깊은 밤 깊은 곳』 『배반의 축배』 『한밤의 축제』 등으로, The Maked Face』는 『벌거벗은 얼굴』 『화려한 외출』 『천사의 얼굴』 등으로 각각 제목만 바뀐 채 출판되고 있어 독자들의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작품을 서로 다른 출판사들이 제목만 바꾸어 중복 출판하는 사례 때문에 이미 읽은 책을 사갔다가 항의와 함께 이를 다시 반품하는 독자들도 상당수에 이른다는 것이 서점가의 얘기다.
그러나 시드니 셸던 작품들을 경쟁적으로 중복 출판하는 과정에서 정작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같은 작품의 제목 바꿔 달기」에 그치지 않고 S문화사처럼 자기네 원판 필름을 다른 여러 출판사에 넘겨 자구 하나 틀리지 않은 똑같은 책을 양산하게 하는 범죄적 행위를 저지르는 출판사까지 생겨나고 있다는 것.
S문화사는 86년 『밤의 이면』을 첫 출간한데 이어 지금까지 『천사의 분노』 『신들의 풍차』 『게임의 매스터』 『거울 속의 이방인』 『벌거벗은 얼굴』『내일이 오면』 『혈통』등 시드니 셸던의 소설만 8권을 냈는데 이들 책 8권의 필름원판을 복제한 뒤 이들을 보람·덕성·우성·청송·금호·국제 등의 동업출판업자들에게 팔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필름을 산 출판사들은 내용의 자구, 심지어는 페이지 배열까지 똑같은 책을 제작, 번역차 이름과 제목만을 바꿔 서점에 출고하고 있으며 실제로 조사해본 결과 이들 출판사가 발행한 시드니 셸던 시리즈의 상당부분이 S문화사판 필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출판업자는 『서구문화의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들을 바탕에 깔고 문학성보다 말초적 재미와 오락적 요소만을 전달하는 시드니 셸던의 소설들이 나올 때마다 베스트 셀러로 자리 잡게 되는 우리의 독서풍토도 한심스럽지만 조금 날린다 싶으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같은 내용의 책을 중복 출판하는 출판업자들의 자세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교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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