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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메아리 없는 시민 불만이 포퓰리즘에는 기회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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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일산대교 통행료 무료화의 정치학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재명 경기지사의 일산대교 통행료 무료화 기사 댓글 중 눈에 띄는 게 있었다. “국민연금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는 (노후를 연금에 의존하는) 중년층 이상이 불안해하고 분노할 가능성이 높다. 과연 경기 북부 주민 표가 다수 국민의 표보다 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지사 비판자로 추정되는 이 댓글 작성자의 바람대로 흘러갈 가능성은 작다. 통행료 인하라는 이익은 구체적이고 즉각적이다. 반면 국민연금 혹은 재정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이익의 지역화, 비용의 사회화’는 강력하고도 현실적인 선거 전략이다.

13년 해묵은 현안 해결 지지부진
주민 정서 파고든 이재명식 해법
대선 앞둔 포퓰리즘 분명하지만
보수 정치에겐 어떤 대안 있는가

일산대교 문제는 이 지사에겐 기회였다. 그는 “지역의 오랜 숙제를 해결한 결단”이라고 주장한다. 반대쪽에서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6개월 남은 대선 국면에서 논란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다. 표와 비난 사이를 저울질하다 행동에 옮겼다. 성남시장 8년, 경기지사 3년 동안 보여준 특유의 저돌성이 다시 한번 작동했다.

‘묵은 숙제 해결인가, 선거용 포퓰리즘인가.’ 관련 기사들의 제목 중 하나다. 이번 사안을 일도양단 식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이 지사 결정에 포퓰리즘 성격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포퓰리즘 정치도 여건이 돼야 가능하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역 주민의 불만과 정서까지 고려해 문제를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누적된 불만, 이를 잡아챈 정치

일산대교 모습. [사진 일산대교㈜]

일산대교 모습. [사진 일산대교㈜]

2008년 개통된 일산대교는 개통 직후부터 지나치게 비싼 통행료로 논란을 빚었다. 고양시 일산 주민과 김포 시민들은 1.84㎞ 길이의 다리를 건널 때마다 1200원(승용차 기준)을 꼬박꼬박 내야 한다. 주요 민자 도로에 비하면 3~5배나 높은 수준이다. 이 다리를 통해 출퇴근하는 시민들은 하루 2400원, 한 달이면 5만원 정도를 지불했다. 심지어 많은 유료도로에서 시행하고 있는 출퇴근 시간대 할인 같은 조치조차 없었다. 가장 가까운 대체도로인 김포대교는 8㎞ 이상 떨어져 있다. 사회기반시설이 몰려 있는 수도권 남부와 비교하면 주민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만했다. 민원이 숱하게 제기됐지만, 통행료는 오히려 두 차례나 올랐다.

이 지사는 이런 불만을 잡아챘다. 공격 지점은 국민연금공단의 수익 구조다. 공단은 2009년 11월 2000여억원을 들여 5개 민간건설사로부터 일산대교 운영사의 지분 100%를 사들였다. 투자금 대부분은 대출금 형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자금이 부족한 SOC(사회간접자본) 투자자들은 다른 금융기관에서 조달한 돈을 이용하지만, 900조원 이상의 적립금을 보유한 공단은 자체 자금을 동원했다. 말하자면 ‘셀프 대출’인 셈이다.

문제는 이자율이다. 선순위 채권 8%, 후순위 채권 20%로 현재 시장금리에 비교하면 대단히 높다. 이 때문에 일산대교는 통행료 수입의 절반 이상을 국민연금공단에 차입금 이자 명목으로 지급했다. 이 지사가 국민연금공단에 대해 “배임죄·사기죄로 처벌받아 마땅한 불법 부도덕 행위다. 해 먹어도 적당히 해 먹었어야지 악덕 사채업자냐”고 거친 발언을 쏟아낸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국민연금공단의 ‘고수익 장사’는 다른 곳에서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2017년 김명연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10여년간 국민연금공단이 5개 민자 도로법인에서 총 2조2700여억원의 이자 수익을 올렸다”며 “국민이 맡겨 놓은 노후자금을 굴려서 국민에게 이자 장사를 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계약 금리를 낮추는 ‘자본재조달’이나 사업 방식 변경 등을 통해 통행료를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통행료 인하 등 합리적 해법 실종

수도권 제1 순환고속도로의 북부구간 통행료 문제가 대표적 사례다. 이 도로는 국민연금공단이 지분 86%를 소유한 ㈜서울고속도로가 운영하고 있다. 일산IC에서 퇴계원IC까지 통행료가 소형 승용차 기준 4800원으로 남부구간의 2.64배나 되는 바람에 불만이 팽배했다. 정치권까지 나선 끝에 결국 ‘사업 재구조화’를 통해 통행료를 3200원으로 낮췄다. 민자법인 운영 기간을 늘리고 투자자를 바꾸는 방법으로 해법을 찾았다. 영종대교, 인천대교(2022년 통행료 인하 예정), 대구부산고속도로, 서수원-평택 고속도로 등 다른 민자 도로도 비슷한 방식으로 통행료를 낮췄다.

이에 반해 일산대교에 대한 해법 모색은 더디기만 했다. 경기도와 국민연금공단이 10년 이상 벌인 답답한 실랑이 속에서 주민 불만은 커졌다. 새누리당 소속 남경필 전 지사는 최소운영수입보장(MRG) 협약에 명시된 보조금 지급을 미루는 등 강수를 뒀으나 소송전 끝에 패소했다. 황금알 낳는 거위를 연금공단이 포기할 리 없었다. 시민사회와 학계는 운영권 연장 등 사업방식 변경을 통해 통행료를 낮추는 방법을 제시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이재명 지사가 대선을 앞두고 ‘공익 처분’이라는 카드를 던진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으로서는 보상액이 충분치 않을 경우 배임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송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합리적 대안을 찾지 못한 민생 문제가 정치의 영역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포퓰리즘은 분노를 먹고 자란다

이 지사의 해법은 즉흥적 결정이 아니다. ‘공익 처분’ 칼을 꺼내기 전 6개월 이상의 법적 검토를 거쳤다고 한다. 민간투자사업법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주무관청이 민자사업 승인을 취소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하지만 대규모 기반시설에 대한 적용은 전례가 없었다. 보상가를 둘러싼 소송전도 예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판결이 나려면 시간이 걸린다. 설사 지더라도 인기가 자산인 정치인으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다. ‘후견주의’(정치인이 특정 집단에 특혜와 지원을 주고 이들의 표를 얻는 행위)니 ‘지사 찬스’니 같은 비난이 쏟아지겠지만,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지지층이 아니다. 역시 승부사다운 감각이다. 포퓰리즘에도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포퓰리즘은 자양분 없이 자라는 게 아니다. 포퓰리즘의 첫 번째 요소는 분노다. 대중의 분노와 이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정치인이 만날 때 포퓰리즘은 시작된다(장훈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대중의 박탈감이 커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서구 정치에서 포퓰리즘의 득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통행료 문제 하나에 이런 거시적 틀을 갖다 대는 건 과장일 수 있다. 하지만, 일산대교는 포퓰리즘이 어떻게 배양되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시험관이다. 10년 이상 해결되지 않는 현안, 이에 대한 지역민의 분노와 박탈감, 소극적이고 둔감한 공적 영역, 그리고 이를 포착한 정치인이 만나 빚어진 결과다.

이 지사에게 포퓰리스트란 용어는 욕이 아니다. 그는 “국민을 대리하는 게 정치고, 이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게 곧 포퓰리즘”이라고 말한다. 이런 ‘대놓고 포퓰리스트’에게 “포퓰리즘이냐 아니냐”고 몰아세우는 게 유효한 공격이 될까. 이재명식 포퓰리즘은 그와 경쟁할 정치 세력에 어려운 과제를 던진다.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서도 지속가능한 미래와 조화를 이루는 정책의 선제적·창의적 개발이 그것이다. 이번 대선은 보수 정치에 이런 능력이 있는지를 묻는 시험장이 될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 연 이재명식 해법

이재명식 해법은 주민 입장에서는 시원하다. 하지만 부작용도 불가피하다. 요금 문제로 이용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는 전국의 민자 SOC 시설이 영향을 받는다. 당장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과 성산구 귀산동을 잇는 마창대교가 논란 대상이다. 경남도의회에서 여당 소속 의원은 “일산대교처럼 공익 처분은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길이 1.7㎞ 마창대교의 통행료는 소형차 기준으로 2500원. 게다가 8년마다 500원씩 오르기로 되어 있다. 이 다리는 일산대교와 달리 외국계 자본인 맥쿼리가 대주주다. 자칫 국제 분쟁으로도 번질 수 있다.

전국 31개 민자 유료도로 중 8개나 포진한 부산 시민들의 불만도 자극할 수 있다. 울산에서는 울산대교와 염포산 터널을 무료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SOC 민자 유치는 정부가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민간에게 투자를 맡긴 방식이다. 이용자 불만을 이유로 손바닥 뒤집듯 뒤집으면 신뢰는 땅에 떨어진다. 민자 SOC 사업 위축은 불 보듯 뻔하다.

2050년대 중반 적립금이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되는 국민연금에도 악영향을 준다. 기금 고갈을 늦추기 위해서는 더 걷고 덜 주는 방향의 구조 개혁이 필요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그렇다면 기금 운용 수익률이라도 높여야 하는데, 이재명식 해법이 일반화되면 이마저도 위협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