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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보고 활짝"…98살 할머니는 딸만 흐뭇하게 바라봤다 [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중앙일보 새 디지털 서비스 '인생'사진 찍어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이 보내주신 사연을 인생 사진으로 찍어드립니다.
'인생 사진'에 응모하세요.
'인생 사진'의 주인공으로 모시겠습니다.

'인생 사진'은 액자로 만들어 선물해드립니다.
아울러 사연과 사진을 중앙일보 사이트로 소개해 드립니다.

▶사연 보낼 곳: photostory@joongang.co.kr
▶7차 마감: 9월 30일

어머니의 친구이자 애인이 되어준 제주도 보목바다 섶섬 앞에 앉은 모녀. 100세를 앞둔 어머니와 딸은 추억 앨범 속에 자리 잡을 한장의 인생 사진을 이곳에서 남겼습니다. 김경록 기자

어머니의 친구이자 애인이 되어준 제주도 보목바다 섶섬 앞에 앉은 모녀. 100세를 앞둔 어머니와 딸은 추억 앨범 속에 자리 잡을 한장의 인생 사진을 이곳에서 남겼습니다. 김경록 기자

저는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마을에서 

98세(23년생)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딸(60년생)입니다.

어머니는 제 나이쯤 미국으로 가셔서 17년을 사셨습니다.
아이들을 돌봐주면 공부해보겠다는
아들의 요청에 따른 이민이었습니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말도 모르고 귀도 먹은 채 17년을 사신 겁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 후 제가 모시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서귀포에서 처음 세워진 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머니는 가끔 한밤중에 슬며시 집을 나가 실종되곤 하였습니다.
119를 통해 찾아보면,
공원 속 수풀 더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어쩌면 미국에서 아버지를 깊은 땅속에 묻고 온 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관을 땅속에 수직으로 깊이 묻어서
표면이 평평하게 공원 같은 공동묘지를 조성하더군요.

깜짝 놀란 어머니는 같이 묻히겠다며
구덩이로 뛰어들려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를 붙들고 달래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을 바꿔보기로 하였습니다.
우선 어머니가 미국 가시기 전까지 사셨던 곳이 바닷가 마을이고,
하셨던 일이 해녀임을 떠올렸습니다.

그래, 바다다!

우리는 당장 바다가 마당처럼 펼쳐진 곳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서귀포시 보목동,
섶섬이 집 앞에 펼쳐져 보이는 곳입니다.

그 바다를 보자,
어머니의 얼굴에 파도가 일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생기를 되찾은 어머니는
물때가 되면 바다로 나가서 보말을 잡기 시작했고,
“싸는 물 이시민 드는 물 이신다(썰물이 있으면 밀물이 있다)”는
해녀들의 속담을 털어놓았습니다.
"미국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린 대신,
 고향에서 바다를 다시 찾았노라”라고도 하셨죠.

그 어머니가 이제 98세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보낸 17년을 한국에서 다시 살아낸 셈입니다.
‘어머니가 미국에서 잃어버린 17년 세월을
고향에서 다시 찾으셨으면….’ 하는 제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기력이 쇠약해지셔서
문득문득 아버지를 떠올리시며,
천국 갈 이야기를 하시곤 합니다.
이제는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준비할 때가 된 게지요.

지난 17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해주었던 바다를 배경으로,
이왕이면 엄숙하기보다 파도처럼 파안대소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사진을 찍어드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친구, 애인이 되어 준
보목 바다 섶섬과 함께 말입니다.
저도 그 옆에 파도처럼 배경이 될 수 있다면 더없는 기쁨이겠지요.

그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
17년을 한결같이 친구가 되어 준
섶섬에 대해 작별인사도 할 겸 말입니다.


'카메라 보고 웃어볼까요?'라는 요청에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딸 얼굴만 쳐다봅니다. 딸의 웃는 얼굴만 봐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나 봅니다. 김경록 기자

'카메라 보고 웃어볼까요?'라는 요청에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딸 얼굴만 쳐다봅니다. 딸의 웃는 얼굴만 봐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나 봅니다. 김경록 기자

딸의 말처럼 바다가 마당인

제주 서귀포 어머니 댁에서
사연의 주인공들을 만났습니다.

보말을 까고 있는 어머니와 딸은
분홍색 모자와 보라색 옷을 입은 채였습니다.

더구나 화장까지 한 어머니는 10년은 족히 젊어 보였습니다.

어머니 얼굴이 사진에서 검게 나오는 게 싫다는 딸 성화에
화장까지 한 겁니다.

고운 사진을 남기고 싶은 모녀의 마음이 한눈에 전해져 왔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사진 찍을 장소, 엄마의 바다로 향했습니다.

섶섬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어머니,
카메라를 보며 자연스레 웃었습니다.
그 자연스러움, 당신의 바다니 더없이 자연스러운 겁니다.

어머니의 웃음이 하도 자연스러워 딸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어찌 이렇게 잘 웃으시죠?”
“손주들과 함께 이곳에서 자주 가족사진을 찍어요.”

당신의 바다에서 이젠 가족의 바다가 된 겁니다.
어머니에겐 오늘 역시 가족사진 찍는 날이기에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환한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어머니와 딸은 닮은 채 서로를 품었습니다.
어머니의 바다를 배경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
모녀이자 친구 같고 연인 같았습니다.

“어머니, 물질할 때 뭐 잡으면 기분 제일 좋아?”
“아이고 뭐 좋은 게 있나.”
“그래도 전복 잡으면 좋지?”
“기분 안 좋아, 물질하는 게 힘들어.”
“맞아, 힘든 일이야.”
“그래 목숨도 걸고, 아주 박한 일이야.”
“그래도 그 덕분에 어머니 자식들 다 키웠잖아. 고마워요. 어머니”

'고마워요. 어머니'. 딸이 이 말을 하는 순간 울컥했습니다. 힘든 세상,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서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김경록 기자

'고마워요. 어머니'. 딸이 이 말을 하는 순간 울컥했습니다. 힘든 세상,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서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김경록 기자

모녀는 집으로 돌아와
따스한 햇볕이 넘나드는
거실 통유리창 앞에 앉아 대화를 이었습니다.

“고생했어요. 어머니.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 다 알아요."
“고맙고, 고생 아니지.”
“아이 많이 낳아 고생했고,

물질한다고 고생했고,
어머니 덕분에 우린 행복했네.
정말 사랑해, 어머니.
나는 어머니 덕분에 살아.
오래오래 살아야 돼.
100살 아니 102살까지….”

딸이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건넨 고마움,
오래 가슴에 맺힐 모습이었습니다.

딸의 바람처럼,
어머니의 바다와 함께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모녀는 서로를 감사하는 만큼 꽉 안아주었습니다. 김경록 기자

모녀는 서로를 감사하는 만큼 꽉 안아주었습니다.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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