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박정호의 시선

박말똥이를 위한 오마주

중앙일보

입력 2021.09.13 00:29

업데이트 2021.09.1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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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상영 중인 노세환 작가의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 박정호 기자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상영 중인 노세환 작가의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 박정호 기자

전시관 사방에 수많은 이름이 줄줄줄 흘러내린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전장(羅鈿匠) 박의일·김해선·취이…, 동장(銅匠) 장자방·허의순·장충헌…, 목장(木匠) 김삼명·김추업·문의선…. 박물관에 확인하니 8000여 명에 이른다. 때론 SF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이름들이 명멸하며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작품명은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다. 2분 27초짜리 미디어 아트다. 17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300년 동안 조선시대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 나오는 각 종목 장인을 소환했다. 가례도감은 왕실 혼례(가례)를 위해 설치한 임시기관(도감)을, 의궤는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을 말한다.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조선의 독특한 기록문화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옛 마스터들을 3D 영상으로 불러낸 이는 노세환 작가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문화재와 마주쳤지만 그 뒤에 숨은 장인은 알아보지 못했다.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그들의 존재를 잘 몰랐다.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사소한 유물도 새롭게 보게 된다”고 했다.

 이 작품은 요즘 ‘인스타 성지’로 떠오른 서울공예박물관 2층에 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은 현대 작가들의 ‘신상’이 가득한 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 주로 눈과 마음을 앗기지만 그 곱고 예쁜 공예품도 상당 부분 과거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부모 없는 자식 없는 법이다. 이른바 문화 DNA다.
 문화는 선배를 먹고산다. 노 작가도 한서대 장경희 교수의 선행 연구 덕분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장 교수는 8년 전 『의궤 속 조선의 장인』이란 방대한 책을 냈을 냈다. 상하 두 권, 2000여 쪽에 조선시대 장인 10만 명을 불러 모았다. 가례·흉례(凶禮·장례) 등 각종 의궤 542권에 등장한 장인들을 종목별로 정리했다.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먼지 낀 마이크로필름을 돌려보며 장인 관련 대목을 빠짐없이 복사·연구했다.
 노 작가 신작을 보며 8년 전 후배 기자와 함께 장 교수를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신분이 낮은 장인들을 왕실 문헌에 빼곡히 올리며 후세에 전한 조선 사람들의 뜻을 반추해봤다. 당시 장 교수의 말이다. “양인(良人) 외에 천인(賤人)도 명단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박말똥이·오개똥·나돌쇠 등등.”

 장 교수와 오랜만에 통화했다. 박말똥이·오개똥·나돌쇠, 한국 문화의 밑바탕을 다져온 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여전했다. “명단 정리 이후 장인들의 작업과 일생을 파고들었어요. 일례로 어보(御寶·임금 도장)나 옥책(玉冊·왕이나 왕비의 존호를 올릴 때 옥 조각을 엮어서 만든 책)을 만들 때 장인 수십 명이 참여합니다. 또 그들은 각기 40~50년 활동했고요. 지금껏 정리한 분량만 A4용지로 5000쪽이 넘어요.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웃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전시 중인 조덕현 작가의 ‘오마주 2021-Ⅱ’. [사진 조덕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전시 중인 조덕현 작가의 ‘오마주 2021-Ⅱ’. [사진 조덕현]

 문화, 나아가 역사를 짊어진 무명인의 자취를 최근 또 다른 곳에서 만났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에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시작해 우리 전통 문화재와 근·현대 미술품을 견주며 한국미의 원형을 탐색한 이번 특별전의 마지막 코너에서 마주친 조덕현 작가의 ‘오마주 2021-Ⅱ’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이 작품은 가로 830㎝, 세로 350㎝ 대작이다. 화폭을 가득 채운 한복 차림의 갑남을녀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듯하다. 20세기 초반에 살다간 우리네 할아버지·할머니들이다. 작품에는 한국의 슬픈 근대사가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한국인의 인류학적 특성, 즉 신체 조건을 조사하려고 지역별로 찍은 유리건판 사진이 모태가 됐다.

 조 작가는 이들 사진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시대 상황은 열악했지만 사람들 눈빛은 살아 있었습니다. 형형했어요.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옛사람들에 대한 제 지식이 얼마나 알량했는지 반성하게 됐죠. 원판 사진을 토대로 옛사람 256명의 모습을 연필로 다시 그렸습니다.”

 조 작가는 작품 속에 오세창·전형필·최순우·윤이상·백남준·나혜석 등 20세기 문화인도 슬쩍 집어넣었다. 고난에도 꺾이지 않은 민초·예술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루하루가 퍽퍽한 요즘이다. 한가위가 다가왔건만 전혀 흥이 나지 않는다. 코로나19 때문에 가족·친지 간에 따듯한 밥 한 그릇 나누기도 쉽지 않다. 비방·모략이 판치는 대선 정국도 어둡기만 하다. 그래도 추석은 추석이다. 차례상에 오를 ‘대추 한 알’을 새겨본다. 시인 장석주가 읊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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