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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때 트럭에 끌려간 순이…‘안점순 기억의 방’에서 만난다

중앙일보

입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故 안점순 할머니가 독일 레겐스부르크 비젠트 네팔 히말라야 파비용 공원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쓰다듬고 있다. 수원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故 안점순 할머니가 독일 레겐스부르크 비젠트 네팔 히말라야 파비용 공원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쓰다듬고 있다. 수원시

‘순이’의 인생은 14살 때 뒤바뀌었다. “큰 방앗간 앞으로 모이라”는 방송에 엄마 손을 잡고 나간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이 쌀가마를 재는 저울에 순이를 올려 체중을 재더니 트럭에 태웠다. “내 딸을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이냐”는 어머니의 울음 섞인 항의에도 트럭은 달렸다.

종착역은 중국에 있는 한 일본 군부대였다. 순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3년이 지났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군은 순이를 비롯한 소녀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살아남은 순이는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평화 활동가인 고(故) 안점순(1928~2018) 할머니의 이야기다. 할머니는 고국으로 돌아온 뒤 조용하게 살았다. 1991년 故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공개하면서 실상이 알려지자 1993년 8월 조카가 피해자로 처음 신고했다고 한다.

수원 지역 평화·인권활동가 안점순

할머니가 ‘안점순’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것은 75세가 된 2002년이었다. “다시는 나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며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UN 인권위원회 여성폭력문제 특별보고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ILO(국제노동기구)의 국제심포지엄에도 참여해 자신의 경험을 쏟아냈다. 직접 일본으로 가 증언 집회 및 일본 국회에서 참혹한 전쟁의 피해를 낱낱이 밝혔다. 다른 아시아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2015년 한일합의 무효를 외치며 위로금 수령을 거부했다.

2014년 5월 수원시 올림픽 공원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수원시

2014년 5월 수원시 올림픽 공원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수원시

평화와 인권을 위한 할머니의 노력은 할머니가 1992년부터 사는 경기도 수원시에도 파문을 일으켰다. 시민들이 나서서 “수원 지역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모금 운동을 통해 평화상 건립기금 8000여만 원이 모였다. 수원시도 지원했다. 2014년 5월 수원시청 맞은편에 있는 올림픽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수원지역 평화·인권단체인 ‘수원평화나비’도 만들어졌다. 안 할머니와 수원평화나비, 수원시는 유럽 최초의 평화비 건립도 추진했다.

2016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와 자매결연을 한 수원시가 소녀상 건립을 제안했고, 74개 시민단체와 함께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시민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조직적인 방해로 프라이부르크 소녀상은 결국 무산됐다.

할머니와 수원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 현지에서 독일추진위가 결성돼 힘을 보태면서 2017년 7월 독일 중남부 레겐스부르크 인근 네팔 히말라야 파비용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섰다. 제막식에 참석한 안 할머니는 “더는 험한 세상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소녀상에는 ‘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할머니는 독일에 소녀상이 생긴 지 8개월 뒤인 2018년 3월 삶을 마감했다. 수원시는 할머니의 장례는 수원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또 명예의 전당에 ‘수원을 빛낸 8인’의 한 명으로 할머니를 올렸다.

수원시, 안점순 기억의 방 개관 

안 할머니에 대한 추모는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수원시는 지난 1일 수원시 가족여성회관에 안 할머니를 기리는 ‘용담 안점순 기억의 방’을 개관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이름을 정식 명칭으로 운영되는 곳은 ‘용담 안점순 기억의 방’이 최초다.

안점순 기억의 방을 둘러보는 염태영 수원시장. 수원시

안점순 기억의 방을 둘러보는 염태영 수원시장. 수원시

당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인 8월 14일에 개관하려 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뒤늦게 개관했다. 48㎡ 규모의 전시실에는 안 할머니의 활동 모습과 증언, 생애가 고스란히 담겼다.

4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름과 나이, 증언 등이 적힌 노란 조각들을 담아낸 김서경 작가의 작품도 전시돼 있다. 전시실 안엔 작은 소녀상이 설치됐는데, 이는 광교신도시 내 한 공동주택 입주자협의회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수원시 관계자는 “개관 이후 하루 평균 20~30명이 찾아올 정도로 안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기억의 방이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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