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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공장 밤엔 택배…57만명이 투잡 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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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경기도 시흥의 중소 제조 기업에서 일하는 서모(37)씨는 6개월째 배달 알바 부업을 하고 있다. 일감이 많던 시기에는 초과근무 수당으로 부족한 소득을 충당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일감이 줄면서다. 서씨는 평일엔 퇴근 후 4시간 정도, 주말에는 10시간 정도 오토바이를 타고 식당가·아파트 단지를 오간다. 서씨는 “평일엔 5만원, 주말에는 10만원을 버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손에 쥐는 돈이 줄면서 본래 직업과 부업을 병행하는 이른바 ‘투잡족’이 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기 침체 심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따른 노동시간 감소, 플랫폼 노동 확대, 고용 여건 악화 등 다양한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9일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이 통계청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본업 외의 일을 하는 ‘부업자’ 수는 7월 기준 56만6000명을 기록했다. 전년보다 19.1%나 급증한 수치로, 2003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대(7월 기준)다.

30인 미만 사업장에서의 부업자 수가 45만9000명으로 전체의 5분의 4 이상을 차지한다. 300명 이상에서는 2만9000명이었다. 사업장 종사자 규모가 클수록 부업자 수는 줄어드는 양상을 나타냈다. 올해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적용되면서 연장근로를 하지 못하는 근로자가 소득 보전을 위해 부업에 뛰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쉽게 일을 찾을 수 있는 대리운전·택배기사·아르바이트 등의 일을 하며 생계비의 구멍을 메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 지난 2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알바콜과 함께 직장인 회원 69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선 20.4%가 ‘코로나 이후 직장을 다니면서 부업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일용직(20.9%) ▶매장 관리 및 서비스업(17.4%) ▶재택 사무직 아르바이트(14.0%) ▶데이터 라벨링(12.8%) ▶과외·교육(12.2%) ▶대리운전(6.4%) 등을 부업으로 택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영세 기업의 근로자는 낮은 급여를 연장근로·심야수당 등으로 보충해 왔는데, 주 52시간제가 시행되니 일하는 시간과 월급이 다 같이 줄어들게 됐다”며 “결국 소득 보전을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 사람이 많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사회적 약자 더 타격, 제도 개선을”

직원을 고용하지 않는 영세 자영업자 가운데 투잡에 나선 사람이 역시 사상 최대를 기록한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7월 15만5000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17.4% 증가했다. 소상공인·자영업자 커뮤니티인 ‘아프니까 사장이다’에는 투잡에 나선 자영업자의 사연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한 회원은 “동네에서 조림류를 파는 한식당을 가족 3명이 운영하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여파로 매출이 반 토막 넘게 줄었다”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남편과 심야로 택배 알바를 뛰고 있다. 최대한 버티는 중이다”고 밝혔다.

추경호 의원은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 수가 30여 년 만에 최소를 기록한 점 등을 고려할 때 결국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에 따라 자영업자의 부담이 커진 것으로 풀이된다”며 “주 52시간제, 최저임금제 등이 사회적 약자 계층을 더 힘들게 하는 만큼 지금이라도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투잡족 증가에는 한 직장에서만 일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전통적 일자리 개념이 변한 것도 한몫했다. 필요할 때 계약직·임시직 등을 섭외해 일을 맡기는 이른바 ‘긱잡(gig job)’도 늘었다. 이젠 투잡의 범위도 유튜버, 프로그래밍, 디자인, 쇼핑몰 운영, 번역, 재능 공유 등으로 다양해졌다. 정연우 인크루트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장은 “생계형 투잡이 아닌 취미를 수익 활동으로 연결하거나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것에 도전하는 ‘자아실현형’ 투잡족도 적지 않다”며 “야근·회식이 줄고 재택근무가 보편화한 영향으로 자기 시간이 많아졌다는 점에서 앞으로 투잡족은 더욱 늘고 다양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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