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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70년 전 제주의 비극…“고통은 생명으로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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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소설가 한강이 5년 만의 신작 『작별하지 않는다』를 낸다. [사진 전예슬]

소설가 한강이 5년 만의 신작 『작별하지 않는다』를 낸다. [사진 전예슬]

소설가 한강(51)이 제주 4·3의 아픔을 어루만진 장편소설을 냈다. 9일 출간되는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다. 소설가인 주인공 경하가 제주 출신 친구 인선과 인선의 어머니 정심을 통해 70여 년 전 제주의 비극을 들여다본다.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에 꼽히는 맨부커상을 받고 같은 해 소설 『흰』을 발표한 지 5년 만의 신작. 전작 『소년이 온다』(2014)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중학생 소년의 죽음과 상흔을 되짚은 데 이어 다시 우리 현대사 비극에 눈을 돌렸다.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제 삶의 악몽들이나 죽음이 제 안으로 깊이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면 이 소설을 건너면서 저 자신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오는 경험을 했어요.”

7일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기념 온라인 간담회에서 한 작가는 집필 당시를 “고통스럽기보다 ‘아, 내가 간절했지’ ‘이 소설이 나를 구해줬지’ 이런 마음”이라고 돌이켰다. “소설을 쓸 때 소설이 요구하는 마음의 상태가 있는데 이 소설은 언제나 지극한 사랑의 상태였다”면서 “쓰는 데 너무 오래 걸려 나 자신도 완성할 수 있는 소설인가 의문을 품기도 했다. 한 시간 전 책을 받곤 뭉클했다”고 했다.

책 표지 사진은 그가 2018년 미국 카네기 인터내셔널에 선보인 20분 분량의 동명 영상 작품 한 장면이다. [사진 문학동네]

책 표지 사진은 그가 2018년 미국 카네기 인터내셔널에 선보인 20분 분량의 동명 영상 작품 한 장면이다. [사진 문학동네]

소설은 경하가 5월의 광주에 관한 책을 낸 뒤 반복해서 밀물에 휩쓸리기 직전의 묘지에 관한 꿈을 꾸는 이미지로 출발한다. 이 첫 두 페이지는 2014년 6월『소년이 온다』발표 뒤 여러 번 꾼 악몽을 토대로 기록해둔 것이다. 꿈에서 그는 눈 내리는 벌판에서 수천수만의 검은 통나무가 심어진 언덕을 발견한다. ‘무덤이구나’ 깨달은 순간 삽시간에 바닷물이 밀려들자 쓸려갈지 모를 뼈들을 어찌할지 몰라 나무들 사이를 달리다가 깨어났다고 했다. 언젠가 소설의 시작이 될 거라 생각하면서였다.

처음엔 2015년 황순원문학상 수상 단편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이어 2018년 김유정문학상을 받은 ‘작별’을 잇는 ‘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구상했지만 영글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문득 생각난 기억이 부싯돌이 됐다. 1996년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제주에 잠시 머물 때 방을 내준 할머니가 동네 어떤 담벼락 앞에 멈춰 서서 “여기가 4·3 때 사람들이 총 맞아 죽은 곳”이라고 했던 순간이다.

“눈부시게 청명한 오전이었는데 무서울 정도로 생생하게 그 일들이 실감으로 다가왔어요.”

소설에서 경하는 손가락 절단 사고를 당한 인하의 부탁으로 제주도 인하의 집에 남은 새를 구하러 가다 폭설에 갇혀 생사를 넘나든다. 그리고 오래전 인하와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곳에서 잃어버린 오빠를 찾아 시체 사이를 헤맨 열세 살 정심의 비극을 마주한다.

한 작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경하와 인선, 인선의 어머니, 죽은 사람들로 이어진 실이 하나로 연결되고 그 실에 전류가 통하고 생명이 돌게 되는 것을 상상했다”면서 “손가락을 봉합할 땐 붙인 자리에 계속 상처를 만들어 피가 흐르게 하고 계속 전류가 흐르게 하고 생명이 흐르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려나간 부분이 썩어버린다. 고통스럽지만 환부에 바늘을 찔러넣어 살아있게 만드는 과정이 소설 전체와 이어진다”고 했다. “껴안기 어려운 것을 껴안을 때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이 죽음 대신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는 마음을 담아 썼다”고 했다. 후반부 환상성에 대해선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여러 개의 삶을 살게 한다. 나만의 삶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동시에 살게 한다. 그 자체가 초자연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8년 12월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후반부를 쓸 무렵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았다. 실제 소설의 배경도 같은 시기다.

“이 소설에는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코로나로) 우리 삶이 이렇게 고립된 것인가, 라는 생각을 특히 많이 했다”면서 “함께 있어도 마스크하고 악수도 포옹도 하지 못 하는 시절을 통과하고 있다. 이 고독한 경험을 집단으로 하고 있기에 오히려 더더욱 연결되고 있고 간절하게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단지 우리가 우리의 방에, 개인사에, 자신의 삶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의 몸이 닿지 않더라도 밖으로 뻗어 나가 닿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그런 마음이 이 소설을 쓰는데도 조금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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