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세희의 남자 읽기] '따로 부부' '함께 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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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모처럼 3박4일을 아내와 둘이서 보내게 된 J씨(44). 아이들 뒷바라지에 시달리던 아내의 휴가(?)를 함께하려고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이틀간 아내와 단둘이 저녁 시간을 보냈던 그는 사흘째, 은근히 아이들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첫날은 단둘이 외식도 하고 이런저런 아이들 문제, 주변 사람 사는 모습들을 이야기하며 지냈지만 다음날은 아내와 함께 뭘 해야 할지 몰라 연신 TV 채널만 돌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공유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진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아내의 관심사는 아이들 공부와 재테크다. 아이들 스케줄을 관리하면서 친구.이웃들과 어울려 과외 .부동산.쇼핑 등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는 일이 아내의 하루 일과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남편의 관심사는? 딱히 떠오르진 않지만 사회생활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있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출근해서 하루 내내 하는 일도 대부분 이 목적을 위함이 아닌가.

여유시간을 보내는 취미생활은? 아직 없다. 그저 퇴근 후 회사 동료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나 부르는 정도다. 얼마전 운동을 시작했지만 아직 재미를 붙이진 못했다.

J씨는 부부간 '따로 문화'에 익숙한 우리나라 중년부부의 모습을 대변한다.

결혼과 더불어 대부분 가정에선 남편은 바깥 일을, 아내는 집안 일을 담당한다. 일종의 묵시적 역할 분담을 해온 셈이다. 이처럼 각자 맡은 분야에만 충실하다 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아내와 남편은 하는 일도, 관심사도 다른 이질적인 문화권에서 살기 쉽다. 그래도 젊을 땐 남녀간 열정과 사랑이 있어서, 아이들이 생긴 후엔 자식 때문에 기쁨과 고민을 부부가 공유하면서 지낸다. 하지만 자식이 품안을 벗어나면서부터 부부간 이질감은 표면 위로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J씨도 대학 때 서클에서 만난 아내와 영화 한편을 봐도 각자의 느낌을 토론하고 공감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아내는 매사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딴 세계 사람인 듯 느껴질 때가 많다.

자식문제만 해도 그렇다. J씨는 솔직히 자식에 대한 아내의 지나친 교육열이 불만이다. 아내의 치맛바람으로 원하는 대학에 갈 수는 있는 건지, 과외에 찌들린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병들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스럽다. 하지만 자신있는 정답을 내놓지 못해 그저 묵묵히 방관할 뿐이다. TV를 볼 때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프로가 확연히 다른 것은 물론이다.

지금도 이러니 아이들이 완전히 독립한 뒤 둘만 남은 긴긴 노후를 뭘 하면서 함께 보낼까 걱정이다. 정답은 하나다. 이제라도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부부문화를 하나씩 만들어가야 한다. 시간 날 땐 지겹더라도 아내가 좋아하는 TV 프로를 함께 봐주자. 그런 뒤 내가 좋아하는 프로도 함께 보자고 권해보자. 주말엔 산책이라도 함께 나가자고 청해야 한다. 처음엔 쑥스럽고 재미없더라도 이런 노력을 통해 서로의 공유점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부부가 함께 즐기는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따로 문화에 익숙해진 당신, 오늘 퇴근길엔 아내가 좋아할 비디오 한편을 빌려 둘이 오붓하게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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