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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나랏돈은 주인 없는 공돈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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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신해룡 전 국회예산정책처장·중앙대 행정대학원 교수

신해룡 전 국회예산정책처장·중앙대 행정대학원 교수

기본소득 공약을 놓고 논란이 뜨거워지자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의 이름이 소환됐다. 통화론자의 대부로서 “돈이 문제다(Money matters)”라는 명언을 남긴 프리드먼은 돈 쓰는 네 가지 방법을 언급했다. 내 돈을 나를 위해 쓰는 경우, 내 돈을 남을 위해 쓰는 경우, 남의 돈을 나를 위해 쓰는 경우, 남의 돈을 남을 위해 쓰는 경우다. 그는 “남의 돈을 남을 위해 쓰는 경우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돈값을 하든 말든 함부로 쓴다는 것이다. 정부가 국민의 세금을 눈먼 돈처럼 쓰는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넛지(Nudge)로 유명한 201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탈러도 도박꾼들이 도박장에서 딴 돈을 공짜로 얻은 공돈이라 생각하고 함부로 배팅하는 ‘공돈 효과’(House money effect)를 지적했는데, 프리드먼과 같은 취지다. 나랏돈은 주인 없는 공돈이 아니고 우리의 돈이다.

내년 예산 사상 처음 600조원 돌파
국민 설득하는 정치력 발휘해야

정기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회 예결위는 2020년도 결산 심사를 6일부터 시작했다. 결산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고 결산 결과를 다음 연도 예산에 반영하자는 데 있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평균 예산 집행률은 96.9%다. 계획된 예산을 차질 없이 집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만 2020년도 예산의 경우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1961년 이후 처음으로 추경을 네 번이나 편성했던 만큼 당초 의도했던 집행 성과를 달성했는지 꼼꼼하게 따져야 할 것이다. 불필요한 지출은 부당한 세금의 다른 이름이다.

2022년도 예산안 규모는 604조4000억원으로 사상 처음 600조원 선을 넘어 팽창예산으로 편성됐다. 향후 국회 예산 심사 과정에서 돈 씀씀이 내역을 깐깐하게 살펴야 한다. 진짜 민생 살리기 예산인지, 대선을 앞두고 표심을 잡기 위한 퍼주기 예산인지 옥석을 가려 꼭 필요한 예산만 반영해야 한다.

국채는 1000조원 시대에 들어섰다. 재정준칙조차 마련하지 않고 언제까지 지금 세대의 소요재원을 미래 세대가 갚아야 할 나랏빚으로 꾸려갈 것인가. 재정 건전성은 뒤엎을 수 없는 가치다. 사마천은 “깃털도 쌓이면 배를 가라앉힌다(積羽沈舟)”고 경고했다. 재정 수입과 지출의 극심한 불균형이 번번이 역대 제국을 벼랑으로 내몰았던 역사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 예산이 팽창해 비대해진 상황에서 나라 살림의 품격을 생각하는 재정 운영을 기대해본다.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나라 살림이 지향하는 품격이자 국격이다. 나라 살림의 품격은 하루아침에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나라 살림의 비전을 국민 앞에 소상히 밝히고 설득하는 정치력이 나라 살림의 품격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다.

정치는 부국강병을 위해 존재한다. 예산 시장의 주역인 국회와 정부는 최적 예산 배분의 이상을 헌신짝처럼 버리면 안 된다. 줏대 없는 ‘샤워실의 바보’가 되거나,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갈팡질팡 정책으로 사회적 낭비를 부추겨서도 안 된다. 잘못된 정책 구상과 정책 선택에 따른 방만한 재정 운용의 숙제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오로지 나랏돈의 올바른 길을 찾아 다시 한번 일어서고자 하는 국민의 경제 심지에 불을 붙여주는 촉매제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영국 경제를 회생시키려 분투하던 시절 마거릿 대처 총리는 핸드백 속에 ‘하지 말아야 할 십계명’을 넣고 다녔다. “검약하지 않고 풍요로울 수는 없다. 소득보다 더 많이 쓰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빌린 돈으로 안정을 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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