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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가해자가 숨진 성범죄 사건, 2차 피해 방지책 절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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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찬성 변호사·전 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

박찬성 변호사·전 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

피고인이 사망하면 공소기각 결정으로 해당 사건의 재판이 종결된다. 범죄 수사는 종국적으로 재판을 통한 국가형벌권의 발동을 구하는 절차이기 때문에 피의자가 사망하면 수사 자체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된다. 하지만 최근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 등에서 성폭력 피의자의 사망에도 수사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형사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언명한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사법부의 판결로써 유죄가 인정되지 않고서는 무죄로 추정하는 법적 상태는 깨지지 않는다. 아무리 수사를 더 진행한들 사망한 피의자의 무죄 추정 상태는 바뀔 수 없다. 더는 증거를 모으고 수사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피의자 사망하면 사건 바로 종결
2차 피해 구제 수월하게 고쳐야

누군가는 헌법과 형사소송법도 얼마든지 개정 가능하니 거기에 정해진 원칙을 바꾸고 수사는 물론 재판까지도 진행할 수 있게 하자고 반론할지 모른다. 그러나 법 규정 속에 녹아있는 원칙들은 다수가 옹호하는 시대적 필요에 따라서 아무 때나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범죄 혐의를 받는 당사자의 반대 신문권과 반론할 권리는 문명사회에 정착된 재판 제도의 본령이다. 한국의 법과 대법원 판례도 이를 확고한 원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비교법적 사례들도 그러하다. 미국의 수정헌법은 모든 형사소추에 있어서 자기에게 불리한 증인에 대해 반대 신문할 피고인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보장한다. 미국 연방 대법원도 2004년 반대 신문권이 보장되지 않은 증거는 원칙적으로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당사자의 사망은 반대 신문권의 행사가 불가능해지게 됐다는 뜻인데, 재판의 진행이 명백히 부적절해진 상태에서 수사를 계속하는 것이 근본적 해법이 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논점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2차 피해는 보통 주변인들에 의해 발생한다. 당사자가 사망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보면 당사자의 사망과 그 이후 추가 피해를 준 주변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판단을 진행하는 것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은 없다.

현행 남녀고용평등법이나 성폭력방지기본법 등에 2차 피해에 관한 예시규정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거나 형사 고소를 마친 피해자에게 법에서 예시된 추가적 불이익이 발생한 경우를 2차 피해로 법률상 추정하는 규정까지 두고 있지는 않다. 2차 피해에 관한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도 도입되지 않았다. 무고죄 맞고소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형사 고소까지 한 피해자에게 피의자의 주변인들에 의한 추가 불이익이 발생한다면 이를 일단 2차 피해로 곧바로 추정함으로써, 징벌적 수준의 민사 손해배상 청구를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신설하면 어떨까.

그리고 피해자가 청구하면 피해자 아닌 가해자가 성폭력에 관련된 추가적 가해는 아니었다는 점을 스스로 입증하도록 입증책임을 전환하는 것은 어떨까. 그 공방에 있어서 부당한 공격이 재발하지 않도록 미국의 ‘강간 피해자 프라이버시 보호법’과 연방증거법이 정하는 것과 유사하게 피해자의 평판 등 사건과 무관한 증거는 객관적으로 불가피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정에 제출되지 않도록 제한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 법에는 몇몇 법제에서 입증책임의 전환 법리 선례가 있다. 피해자가 제소하면 법원은 그 전제 사실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을 하게 될 것이므로 비록 민사 재판을 통한 것이지만, 피해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받아볼 수도 있다. 현행법이 유지해 온 여러 원칙 아래에서 가능한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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