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하 발달한 명나라, 해양 진출할 절박함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9.0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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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5세기만 해도 바다의 패권은 중국에 있었다. 명나라 영락제는 환관 정화에게 원정대를 맡겼고 이들은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를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7차례 정화 원정대의 인력은 평균 2만7000여명. 적재중량 2500t 규모의 함선이 60척씩 동원됐다.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때 200t 규모의 배 3척에 120명이 탑승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당시 중국의 앞선 기술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중국은 바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은 그 바닷길을 통해 아시아로 들어와 향신료 등을 무역하며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바다에서 역전된 동서양 지위는 20세기까지 세계사의 방향을 좌우했다. 중국은 왜 대항해시대 목전에서 후퇴했을까.

신간 『대운하 시대 1415~1784』를 낸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사진 조영헌]

신간 『대운하 시대 1415~1784』를 낸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사진 조영헌]

신간『대운하 시대 1415~1784』는 부제 ‘중국은 왜 해양진출을 주저했는가’가 보여주듯 이 미스터리를 풀어나간 책이다. 중국은 유럽처럼 절박하지 않았다. 유럽 전체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물자를 생산할 수 있었고, 대운하를 건설해 이를 곳곳에 유통할 수 있었다. 이게 저자의 결론이다.  이는 한반도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저자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를 3일 만났다.

정화의 원정대 같은 대규모 항해가 왜 이어지지 않았나.
“영락제는 쿠데타로 집권해 정통성이 취약했다. 원정대가 가져오는 각종 진귀한 동물에 흡족해했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덕이 크면 하늘이 각종 영물을 보내준다고 믿어서다. 동아프리카에서 들여온 기린이 한 예다. 또 하나, 영락제는 몽골이 이룩한 제국의 위용을 회복해 자신이 다스리는 시대를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즉, 정화의 원정대는 유럽처럼 경제적 욕구가 강하지는 않았다. 이것에 대운하가 영향을 끼쳤다.”
대운하가 있으니 바다는 필요가 없어진 것인가.
“네덜란드 등이 인도나 중국으로 선박을 보내면 10척 중 3~4척은 못 돌아왔다. 중국은 그런 ‘도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명나라 때 대운하를 통해 물자가 각지에 오갔다. 명나라 이전인 송·원 시대에는 해상진출이 활발했다. 바다로 진출하지 않은 것을 놓고 뒤처졌다고 하는 건 서구적 시각, 기준이다.”
명나라 때 대운하가 발달한 결정적인 요인을 꼽자면.
“영락제는 쿠데타 후 수도를 남경(난징)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대운하를 재건한 건 강남의 물자를 북경으로 옮기기 위한 조치였다. 이전 수도인 남경은 바닷길로 연결되는 도시다. 영락제가 천도하지 않았다면 바닷길이 중시되면서 동아시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나.
“수도가 남경이면 조선 사신들도 해로로 갔을 것이다. 중국-조선-일본-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로가 발달하면서 동아시아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중국 수도가 북경이 되면서 한반도의 가치도 달라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비교적 이른 시기 참전한 것도 한반도를 빼앗기면 수도 코앞에 일본군이 오기 때문이다. 지금도 유효한 문제다. 미·중 갈등이 증폭할수록 중국은 한국을 포기하기 어렵다.”
중국은 아편전쟁 전까지 계속 바다를 걸어 잠갔나.
“아니다. ‘통제 가능한 개방’을 추구했다. 청나라 강희제 때 4곳의 항구를 열었고 명나라 때도 ‘해금(海禁)’ 정책을 폈지만, 연안 지역민들의 밀무역을 일부 허용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서구 열강이 함선을 앞세워 개방 확대를 요구했고,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위협을 느낀 청나라는 바다를 더 엄격하게 닫았다. 중국과 서구가 충돌한 아편전쟁의 시발점이다. 이 과정은 중국과 서구의 갈등이 다시 부각되는 현재를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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