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서 기린 가져온 15세기 중국…왜 돌연 바닷길 버렸나

중앙일보

입력 2021.09.05 17:34

업데이트 2021.09.05 17:45

청나라 건륭제가 대운하를 타고 남순하는 과정을 그린 '건륭남순도' [자료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청나라 건륭제가 대운하를 타고 남순하는 과정을 그린 '건륭남순도' [자료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15세기만 해도 바다의 패권은 중국에 있었다. 명나라 영락제는 환관 정화에게 원정대를 맡겼고 이들은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를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7차례 정화 원정대의 인력은 평균 2만7000여명. 적재중량 2500t 규모의 함선이 60척씩 동원됐다.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때 200t 규모의 배 3척에 120명이 탑승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당시 중국의 앞선 기술을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중국은 바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은 그 바닷길을 통해 아시아로 들어와 향신료, 도자기, 은 등을 무역하며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바다에서 역전된 동서양의 지위는 20세기까지 세계사의 방향을 좌우했다. 중국은 왜 대항해시대의 목전에서 멈추고 바다에서 후퇴했을까.

신간 『대운하 시대 1415~1784』
대운하 통해 바라본 중국 명청사
대운하로 바다 진출 필요성 감소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신간『대운하 시대 1415~1784』는 부제 '중국은 왜 해양진출을 주저했는가'가 보여주듯 이 미스터리에 대해 풀어나간 책이다. 저자의 결론부터 옮기면, 중국은 유럽만큼 바다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간절하지 않았고 그것은 대운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유럽 전체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물자를 생산할 수 있었고 이는 대운하를 통해 곳곳에 유통됐기 때문에 유럽 국가처럼 절박함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운하의 건설로 중국은 강남의 물자를 수도 북경까지 끌어올리며 북경 체제가 지속될 수 있었다. 이는 한반도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저자인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를 3일 만나 이야기를 더 들어봤다.

-정화의 원정대 같은 대규모 항해가 왜 계속 이어지지 않았나.
=명나라 영락제는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다. 정통성 측면에서 취약했던 그는 원정대가 아랍이나 아프리카를 통해 들여오는 각종 진귀한 동물에 대해 흡족해했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덕이 크면 하늘이 각종 영물을 보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에서 들어온 기린이 대표적 사례다. 또 하나, 영락제는 원나라의 제국을 경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몽골이 이룩한 제국의 위용을 회복해 자신이 다스리는 시대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즉, 정화의 원정대는 유럽처럼 경제적 욕구가 강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계속 이어지기 어려웠던 이유다. 여기에 영향을 끼친 게 대운하다.

명나라 영락제 시절 정화의 원정대가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기린

명나라 영락제 시절 정화의 원정대가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기린

-대운하가 있으니 바다는 필요가 없어진 것인가
=네덜란드나 포르투갈이 인도나 중국으로 선박을 보내면 10척 중 3~4척은 돌아오지 못했다.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그런 '도박'을 추진할 필요는 없었다. 명나라 때 재건된 대운하를 통해 충분한 물자가 각지에 오갔다. 반대로 명나라 이전인 송·원 시대에는 해상진출이 활발했다. 그러니 바다로 진출하지 않은 것을 놓고 뒤처졌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서구적 시각이자 기준이다.

-명나라 때 대운하가 발달한 결정적 요인은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긴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영락제는 정치 기반이 남경이 아니라 북경이었다. 천도를 단행한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 북경은 자립이 어려운 정치·군사 중심지였다. 영락제가 대운하를 재건한 것은 풍부한 강남의 물자를 신수도 북경으로 옮기기 위한 조치였다. 이전 수도인 남경은 바닷길로 연결되는 도시다. 영락제가 천도하지 않았다면 바닷길이 중시되면서 동아시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나

=수도가 남경이라면 조선 사신들도 해로를 통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중국-조선-일본-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로가 자연스럽게 발달하면서 동아시아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중국의 수도가 북경이 되면서 한반도의 가치도 달라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대규모 참전을 결정한 것도 한반도를 빼앗기면 바로 수도 코앞에 일본군이 오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지금도 유효하다. 미·중 갈등이 증폭될수록 중국으로서는 한국을 포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소주운하의 전경

소주운하의 전경

대운하는 중국의 남북을 단단히 묶었다. 경제적으로도 내륙 곳곳의 물자가 각지로 이동하면서 경제를 발전시켰다. 조 교수는 "대운하는 유럽으로 치면 지중해 같은 구실을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청나라 때는 황제의 남쪽 순방이 중요한 이벤트였다. 이때 대운하가 이용됐는데, 주요 길목이 다시 정비되고 황제가 거쳐 가는 곳은 대대적 투자가 이뤄지며 지역 경제 활성화도 일어났다.

-중국은 아편전쟁 전까지 계속 바다를 걸어 잠갔나
=아니다. '통제 가능한 개방'을 추구했다. 청나라 강희제 때 4곳의 항구를 열었던 게 대표적이다. 명나라 때도 기본적으로는 '해금(海禁)' 정책을 폈지만, 연안 지역민들은 일본이나 동남아와의 몰래 밀무역을 했고 중앙정부는 일부 묵인했다. 안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까지는 허용한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서구 열강이 강력한 함선을 앞세워 개방 확대를 요구했고,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위협을 느낀 청나라는 바다를 더욱 엄격하게 닫았다. 이것이 중국과 서구가 충돌하는 아편전쟁의 시발점이 됐다. 이 과정은 중국과 서구의 갈등이 다시 부각되는 현재를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포인트다.

신간 『대운하 시대 1415~1784』 [사진 민음사]

신간 『대운하 시대 1415~1784』 [사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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