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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카라쿠배'만 있냐 '삼현에엘'도 있다…최고 직장 신경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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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부모님은 삼성가길 원하시죠. 하지만 전 네이버나 카카오가 됐으면 좋겠어요.”
취업준비생인 A(26)씨는 고려대 경영학 전공으로, 높은 학점과 영어성적에 국가공인 데이터분석 자격증을 갖춘 일명 ‘고스펙자’다. 하지만 제조업이 뿌리인 기존 대기업보다 정보기술(IT) 기반의 기업 입사가 목표다. 그는 “나이나 연차보다 능력 위주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을 배우고 싶어서”라고 했다.

9월 본격적인 하반기 채용 시즌, 일자리 경쟁은 취준생들만 하는 게 아니다. 20·30대 젊은 층 사이에서 ‘가고 싶은 회사’ 기준이 바뀌면서 기업들도 인재 확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네이버 채용공고 화면.

네이버 채용공고 화면.

기존 대기업 VS 신흥 대기업 

대표적인 변화가 ‘네카라쿠배’ 선호 현상이다. 국내 주요 IT기업인 네이버·카카오·라인플러스·쿠팡·배달의민족을 가리키는 이 신조어는 취준생 사이에서 선망의 기업군으로 통한다.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 속 비대면 시대에 IT업계의 연봉과 사회적 인지도가 높아진 게 직접적인 배경이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 우수한 복지제도 등이 알려지면서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장 취업하고싶은 그룹사 톱10.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가장 취업하고싶은 그룹사 톱10.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실제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달 26~27일 4년제 대학 대학생과 취준생 약 7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취업하고 싶은 그룹사를 조사한 결과, 톱3는 삼성(45.4%) 카카오(42.6%) 네이버(25.6%)였다.

해당 그룹에 취업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복지제도와 근무환경이 좋을 것 같아서’가 ‘연봉이 높을 것 같아서’를 앞섰다. 고용 안정성을 중시하는 ‘오래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는 상대적으로 비율이 낮았다.

그룹사에 취업하고 싶은 이유는.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룹사에 취업하고 싶은 이유는.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변지성 잡코리아 팀장은 “10년 전만 해도 삼성이 압도적인 1위였고 금융권이나 공기업들이 수위를 차지했는데 선호 기업의 지도가 많이 바뀌었다”며 “기업의 미래가치와 기업 문화가 가장 중요한 잣대”라고 말했다. 특히 연봉보다 복지를 선호 이유로 꼽은 데 대해 “20대의 경우 기성세대보다 승진에 대한 관심이 낮고 권위적인 상하 문화에 거부감이 강하며, 회사 안과 밖이 명확히 구분되는 기업 문화를 원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줄임말 신조어…어디어디 언급되나 

이런 분위기는 기존 대기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업 명칭만 해도 네카라쿠배처럼 ‘삼현슼(삼성·현대차·SK)’ ‘롯동금(롯데·동부·금호)’ ‘효웅코사일(효성·웅진·코오롱·사조·일진)’ 등 젊은 세대에 익숙한 줄임말로 불리곤 한다.
이와 관련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누구든 자유롭게 쓰고 고칠 수 있는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에는 ‘삼현슼’이란 신조어와 함께 “연봉과 복지가 뛰어나며 사회적 인식 또한 좋은 3개의 기업 집단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등장했다. 하지만 며칠 뒤 해당 신조어는 ‘삼현에엘(삼성·현대차·SK·LG)’로 수정됐고 설명도 3개의 기업 집단에서 4개의 기업 집단으로 바뀌었다.

최근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에 올라온 '삼현슼'(위)과 같은 주제로 수정된 '삼현에엘'(아래) 내용. 사진 나무위키 캡처

최근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에 올라온 '삼현슼'(위)과 같은 주제로 수정된 '삼현에엘'(아래) 내용. 사진 나무위키 캡처

이를 두고 직장인 익명 사이트 등에선 ‘기업 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 것 아니냐’ ‘이제 네카라쿠배가 1티어(선두그룹)다’ 등 설왕설래가 오가기도 했다.

재계 순위 5대 그룹에 근무하다 네카라쿠배 중 한 곳으로 이직한 30대 초반의 김모씨는 “전 직장은 직원들이 거대한 시스템 안에 녹아드는 구조라, 누구 하나 빠져도 큰 문제가 없고 공무원처럼 일하면 됐다”라며 “어느 순간 내가 부품 같고, 보상은 진급 외엔 없는데, 그마저도 능력보다는 연차 순이라 회의가 들었다”고 말했다.

넥슨이 31일부터 이틀간 메타버스 플랫폼 ‘게더타운’에서 여는 채용설명회 ‘채용의 나라’. 넥슨의 대표 온라인게임 ‘바람의나라’의 게임 맵과 넥슨 사옥을 배경으로 한 가상세계에서 직무상담 등이 진행된다. 사진 뉴시스

넥슨이 31일부터 이틀간 메타버스 플랫폼 ‘게더타운’에서 여는 채용설명회 ‘채용의 나라’. 넥슨의 대표 온라인게임 ‘바람의나라’의 게임 맵과 넥슨 사옥을 배경으로 한 가상세계에서 직무상담 등이 진행된다. 사진 뉴시스

IT기업이라고 무조건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플랫폼 기업에 근무하는 B씨는 “대부분 경력직이다 보니 전 직장을 기준으로 연봉이 정해져 같은 팀이라도 페이가 천차만별이다. 성과급만 해도 나는 1000만원인데 옆자리 동료는 2000만원으로 상대적 박탈감이 엄청나다”고 말했다. 이어 “새로운 업무가 필요하면 담당자를 뽑는 식이라 인원은 적고 일의 강도도 무척 세 힘들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신흥 IT 대기업들은 계열사 기업공개(IPO)와 사업 확장 등에 나서며 인력을 빨아들이는 중이다. 올 하반기에도 NHN·카카오·넥슨 등이 채용 절차를 진행해 취준생들의 관심이 뜨겁다.

“기존 시스템 천천히 바꾸면 실패” 

그동안 가만히 있어도 응시자들이 몰렸던 대기업들은 ‘우리도 바뀌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구성원의 수요 변화에 발맞추려 고군분투 중이다. 산업의 중심이 제조업에서 인공지능 등 IT로 넘어가는 가운데 핵심 인력을 뺏기지 않는 것이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4일 2023년까지 3년 동안 반도체·바이오 등에 240조원을 투자하고 4만명을 직접 채용한다고 밝혔다. 중앙포토

삼성전자는 지난달 24일 2023년까지 3년 동안 반도체·바이오 등에 240조원을 투자하고 4만명을 직접 채용한다고 밝혔다. 중앙포토

미래 먹거리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히고 젊은 세대가 중요시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외부는 물론 내부 구성원에게 비전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된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1960~70년대에 창업한 대기업들은 그때 환경에 최적화된 조직과 문화를 가졌는데, 문제는 기존 시스템을 바꾸는 게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라며 ‘급진적인 변화’를 강조했다. 그는 ‘디지털 기업’을 선언하고 1~2년 만에 전사적 체질을 바꿔버린 도요타와 나이키를 예로 들며 “단계적·점진적으로 바꾸려다 보면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공존 기간이 길어지고 결국 옛날 시스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경영진의 의지와 리더십으로 큰 핵심을 중심으로 단기간에 신속하게 바꾸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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