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외교소국」서 벗어나라/박봉식 서울대교수(논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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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의 김일성은 일본에 대해 양국관계를 정상화할 것을 제의했다. 설혹 정당간의 교류에서 시작되었지만 일본 자민당 대표가 총재의 친서를 북에 전달하면서 진행된 일이니 양국의 의지가 표명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이 배격해 온 「교차승인」의 결과를 무릅쓰고 북한이 일본과의 수교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정치행위는 동기가 있으며 그 행위로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 일이 많다. 그 동기가 충동적일 경우 더욱 그렇다.
북한은 이달초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으로부터 한소 국교정상화 방침을 통고받고 충격을 받았으며 뒤이어 김일성의 심양밀행에서 중국으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것 같다. 그야말로 궁여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김일성은 기본적으로 소련과 동유럽을 위시한 공산주의 대붕괴의 역사를 술수로써 모면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경쟁이 안되는줄 알면서 마지막 상황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결코 북한체제를 중심으로 남한적화에 의한 통일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북한은 동시승인국을 하나더 늘리면서도 「두개의 조선」을 배격하는 모순된 정책을 강화하겠다는 것이 지금 북한의 계산인 것 같다.
이로써 소련으로부터 버림받은 처지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일본의 경제력에 기대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특히 일본과 수교한다는 것은 북한을 위해 귀중한 젖줄노릇을 해온 조총련을 고사직전의 상태에서 구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일본내에서 남북한 민족대립을 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서울과 총리회담을 열면서도 상대방 당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과 수교하면서도 남북한간 공존정책을 배격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 또한 정상적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은 북한의 비문명적 인질정책에 굴복하고 말았다. 제18후지산호 선원억류는 불법적이었고 북송 일본인처들의 소식단절은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인간성 말살행위다. 이러한 만행을 간단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유화적 언사에 감읍하는 일도 우스운 일이라 하겠다.
일본은 그동안 경제대국에 걸맞지 않는 외교소국의 지위를 감수해 왔다. 특히 중국과의 수교과정에서 그러했고 소련의 고답적 자세에 굴하지 않으려고 애써왔다. 이제 그들의 식민지였던 지역인 한반도에서는 외교소국의 지위를 벗어나겠다는 생각인지 모른다.
물론 임박한 한소 수교로 러시아가 한반도 전역에 상륙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노력도 보인다.
소련이 일본을 제치고 한국과 국교를 선행시킨데 대한 일본의 불쾌감은 있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일본에 부탁하는 것은 국제외교의 정도를 지키며 한일간의 선린관계를 충동적 동기로 그르치지 말기를 바란다.
지금 상태에서 일본이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북한의 인질정책에 굴복하는 것이 되며 남북한간에 정치적 대결을 천연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본 정부는 북한과 수교하기 전에 북한에 간 일본인처의 인도적 상황을 바로 잡으려하겠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북한의 대남정책 수정을 유도하는 방향에서 진행시켜야 할 것이다. 무릇 국교의 수립은 그 나라와의 평화적인 관계수립과 유지를 목적으로 하며 이것이 동시에 제3자에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지금 북한은 회담에 응하되 회담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며 외교관계를 맺되 외교의 상대로서가 아니라 대남정책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 물론 그들의 의도가 국제정치의 마당에서 의도대로의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그리고 역사의 큰 흐름을 혼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 불가능한 일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고 모든 꾀를 다 쓰고 있는 것 같다.
정당간의 접촉이 정부간의 접촉으로 이어지겠지만 경제대국이자 문화대국임을 자부하는 일본정부의 현명하고 적절한 정책에 기대한다. 그러나 가네마루(금환) 일행이 평양에 가 있는 사이 유엔에서 일본 대표의 한국 유엔가입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음은 유감이다.
일본 정부의 북한과의 수교과정이 남북한 관계의 순조로운 진행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 그리고 북한은 일본을 이용해 우선 급한 일을 면하자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10월의 평양 총리회담에서부터 그들의 속셈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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