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엔 힙지로, 낮엔 쌈지로…OB베어·만선호프 3년 노가리싸움

중앙일보

입력 2021.08.28 05:00

업데이트 2021.08.28 09:18

저녁이면 1500원짜리 노가리 안주에 생맥주 한 잔을 즐기려는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서울 을지로 3가 노가리 골목.

지난 24일 찾은 을지로3가역 노가리 골목에 자리잡은 호프집 모습. 만선호프(왼쪽)와 을지OB베어(오른쪽)가 나란히 한 건물 1층에 자리잡고 있다. 윤정주 인턴기자

지난 24일 찾은 을지로3가역 노가리 골목에 자리잡은 호프집 모습. 만선호프(왼쪽)와 을지OB베어(오른쪽)가 나란히 한 건물 1층에 자리잡고 있다. 윤정주 인턴기자

장사 시작 전인 지난 23일 오전 9시 30분. 골목의 원조 격인 ‘을지OB베어’ 앞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을지OB베어를 강제 철거하려는 법원 집행관과 사설 용역업자, 그리고 이들을 저지하려는 시민단체와 상인 간에 고성이 오가면서 크고 작은 몸싸움이 발생한 것이다. 1시간 정도 이어진 대치 상황은 집행관과 용역업자들이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법원의 철거 강제집행 시도는 이날이 다섯 번째. 1980년부터 4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영업해 온 을지OB베어는 왜 철거 위기에 놓인 것일까.

지난 24일 을지로3가역 노가리 골목에 위치한 을지OB베어의 메뉴판. 윤정주 인턴기자

지난 24일 을지로3가역 노가리 골목에 위치한 을지OB베어의 메뉴판. 윤정주 인턴기자

을지OB베어는 왜 퇴거 거부하나

갈등은 건물주가 지난 2018년 6월 을지OB베어 측에 임대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하면서 시작됐다. 계약 만료를 넉 달 앞둔 시점이었다. 을지OB베어 측이 이를 거부하자 건물주는 같은 해 9월 명도소송을 걸었다. 대법원까지 간 소송은 지난해 10월 건물주 측의 최종 승소로 끝이 났다. 이후 지난해 11월부터 강제 집행을 시작한 것이 을지OB베어 측의 저항에 부딪혀 다섯 차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건물주는 왜 을지OB베어 측과 임대 계약을 만료하려 했을까. 주변 상인들은 을지OB베어와 같은 건물 1층에 나란히 입주해있는 만선호프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노가리 골목 인근에 7개 점포를 가진 만선호프는 영업 규모를 계속 확장해왔다.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와 함께 이른바 ‘힙지로’ 노가리 골목의 양대산맥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24일 찾은 을지로3가역 노가리 골목에 자리잡은 호프집 모습. 윤정주 인턴기자

지난 24일 찾은 을지로3가역 노가리 골목에 자리잡은 호프집 모습. 윤정주 인턴기자

7개 점포 가진 만선, 을지OB베어도 인수 의도?

주변 사정을 잘 안다는 한 상인은 “8년 전에 만선이 이 동네에 들어와 다른 건물주들에게 더 높은 월세와 보증금을 약속해 이웃 가게를 전부 인수했다”며 “만선호프가 을지OB베어 건물주에게도 기존보다 몇배되는 월세와 더 많은 보증금을 약속한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을지OB베어 측이 건물주에게 지나치게 높은 권리금을 요구해 합의가 무산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건물 주차장을 만선호프와 나눠서 사용하는 합의안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을지OB베어 측은 본지에 “현재로써는 드릴 말씀이 별로 없다”며 “심적으로 힘든 상황이니 나중에 연락 달라”고 말했다. 본지는 을지OB베어와 만선호프가 입주한 건물의 주인에게 갈등의 원인을 묻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닿지 않았다.

2019년 4월 서울 을지로3가 ‘노가리골목’은 의 저녁 모습. 중앙포토

2019년 4월 서울 을지로3가 ‘노가리골목’은 의 저녁 모습. 중앙포토

“골목 상권 침해” vs“정당한 재산권 행사”

을지OB베어와 만선호프의 갈등을 전해 들은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만선호프가 골목 상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주장부터 건물주의 정당한 재산권 행사를 나무랄 수 있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24일 노가리 골목을 찾은 직장인 이모(40ㆍ남)씨는 “돈으로 다 눌러버리는 것 아니냐”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물주 마음대로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정모(22ㆍ여)씨는 “(만선호프가) 7개나 있으면 충분한 것 같다. 다양하게 여러 호프집이 있는 것이 골목의 개성을 살리고 좋은 것 같다”고 전했다.

을지OB베어가 강제 철거되는 것을 막기는 어렵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익명을 요청한 한 변호사는 “판결이 최종 확정됐고, 법원이 강제집행에 나섰다면 세입자가 더는 법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면서 “공무집행방해로 형사고소를 당하거나 건물주로부터 강제집행이 안 돼서 날리는 비용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가리 골목의 또 다른 상인은 “40년 동안 장사한 을지OB베어가 쫓겨나면 ‘너 죽고 나 죽자’하는 심정으로 싸움이 격화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여기 상인들은 장사를 크게 하는 사업자의 눈치만 보게 되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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