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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계 히딩크' 라바리니 "난 어떤 운동도 못했다…감독의 꿈, 김연경과 이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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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이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8강전 터키와의 대결에서 이긴 후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과 환호하는 장면.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김연경이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8강전 터키와의 대결에서 이긴 후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과 환호하는 장면.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배구계의 히딩크'.

스테파노 라바리니(42·이탈리아) 감독이 이끈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2020 도쿄올림픽에서 4위에 오르자 많은 이들은 거스 히딩크(75·네덜란드) 감독을 떠올렸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뤘다.

라바리니 감독은 선수들에게 다가가는 친구 같은 리더십, 상대에 대한 예리한 분석으로 큰 성과를 냈다. 중앙일보는 올림픽을 끝내고 이탈리아로 돌아간 라바리니 감독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선수 출신이 아니다. 그는 16세에 유소년 배구팀 어시스턴트 코치가 됐고, 이후 이탈리아 청소년 대표팀 코치를 거쳐 프로팀 코치가 됐다. 그는 "학교 친구들의 배구 코치 덕분이다. 그가 배구에 대한 열정을 키우고, 선수들과의 관계 형성을 하는 걸 지켜보면서 이 일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라바리니 리더십'은 그가 선수 출신이 아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라바리니 감독은 "난 어떤 운동도 잘 못했다. 하지만 도전을 좋아하기 때문에 항상 스포츠에서 성공하는 꿈을 가졌다. 두뇌와 공감으로서 선수들이 성공할 수 있게 돕고, 그 느낌을 조금이나마 나누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고 했다.

친구에게 장난치듯 라바리니 감독 어깨를 토닥이는 김희진. [KOVO 유튜브]

친구에게 장난치듯 라바리니 감독 어깨를 토닥이는 김희진. [KOVO 유튜브]

라바리니 감독은 한국으로부터 지도자 제안을 받기 전 김연경과 이재영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외국인선수들이 이재영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김호철 전 남자 대표팀 감독이 이탈리아에서 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알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뛰는)그의 딸(김미나)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세계 배구 흐름에 뒤처졌던 한국 배구는 라바리니 부임 이후 빠르게 변화했고, 도쿄올림픽 본선 티켓도 따냈다. 하지만 도쿄올림픽이 코로나19로 미뤄지는 악재를 맞았다. 그 사이 주전 선수 2명(이재영·이다영)이 불미스러운 일로 대표팀에서 탈락하는 일도 있었다. 겨울 시즌엔 이탈리아 프로팀(이고르 고르곤졸라 노바라)을 지도했던 라바리니 감독으로선 선수들과 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올림픽을 치르게 됐다.

라바리니 감독은 "선수들과 1년 이상 떨어졌고, 예선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던 선수 여러 명이 빠졌다. 팀의 균형을 찾고, 원하는 플레이 스타일에 맞는 선수들과 플랜B를 결정해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국제대회(올림픽 직전 열린 발리볼네이션스리그)를 치르면서 우선 순위를 가지고 방향을 잡았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김희진과 김수지도 합류했다. 대회를 시작하기 전 충분한 자신감을 얻기 위한 (경남 하동에서 코호트 격리를 하며)연습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가장 신경쓴 부분은 '신뢰'였다. 라바리니 감독은 "올림픽에서 가장 초점을 둔 부분은 성공에 대한 의지와 믿음이었다. 선수들과 개별적으로 대화를 하면서 매 순간의 목표를 설명하고, 팀워크를 믿고 따르고 있는지 확인했다"고 털어놨다.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A조 조별리그 한국과 일본의 경기. 세트스코어 3대 2로 승리한 한국 선수들과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함께 기뻐하고 있다. [뎐합뉴스]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A조 조별리그 한국과 일본의 경기. 세트스코어 3대 2로 승리한 한국 선수들과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함께 기뻐하고 있다. [뎐합뉴스]

대표팀은 조별리그에서 일본을 꺾고 8강 진출을 확정했다. 그리고 8강에서 터키를 제압했다. 두 경기 모두 5세트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특히 일본전에선 코트로 뛰쳐나가 선수들과 '강강수월래'를 하며 환호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두 승리 모두 좋았다. 하지만 일본전에서 더 환호했다.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의 원래 목표인 8강을 이뤘고, 한국인들에게 일본전이 강한 감정을 가진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고 했다.

8강전 상대인 터키는 라바리니 감독에게 스승과도 같은 지오반니 귀데티(49·이탈리아) 감독이 이끌었다. 라바리니 감독은 "나는 귀데티 감독의 어시스턴트 코치였고, 친한 친구다. 하지만 감독이 된 뒤 이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며 "그는 세계 최고의 배구 코치 중 한 명이고, 터키 팀은 국제 무대에서 가장 발전적인 팀이다. 그러나 경기 중엔 개인적인 감정을 잊었고, 준결승에 가는데 집중했다"고 했다.

라바리니 감독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던 건 에이스 김연경(33) 덕분이었다. 2018년 브라질 미나스 테니스 클럽 감독이었던 라바리니 감독은 세계클럽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그는 결승에서 김연경이 뛰고 있던 엑자시바시(터키)를 이겼다. 김연경의 추천으로 그는 감독 후보군에 포함됐다.

4강 진출을 확정지으 ㄴ뒤 김연경이 라바리니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뉴스1]

4강 진출을 확정지으 ㄴ뒤 김연경이 라바리니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뉴스1]

라바리니 감독은 "(2018년 전에도)이미 김연경을 알고 있었다. 몇 년간 최고의 선수였기 때문이다. 네트 건너편에서 본 첫 인상은 '매우 숙련되고, 혼자서 경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팀 동료, 상대편, 코치, 심판, 관중까지 경기장 안의 모든 사람이 그를 존중(respect)한다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런 김연경이 대표팀에서 은퇴한다는 건 라바리니 감독에게도 아쉬운 일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김연경에게는 하고 싶은 말을 했다"며 "배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적이고 슬픈 순간"이라고 했다. 이어 "김연경이 우리 스포츠(배구)에게 준 것에 감사한다. 국제대회에서 보여준 동작 하나하나는 환상적인 쇼였다. 특별하고 엄청난 선수였고, 잊을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경이 은퇴하면서 한국 여자 배구는 세대교체를 피할 수 없다. 라바리니 감독은 "지난 올림픽은 한국 배구에게 국제적인 흐름을 보여준 대회라고 생각한다. 여자 배구는 더 격렬하고 빨라지고 있다. 국제대회에서 더 높은 위치에 오르려면 빠르게 선택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라바리니 감독이 경험한 한국 여자 배구는 한국인과 닮았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온 첫 날부터 나는 한국인들이 정말 잘 뭉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느꼈다. 우리 팀의 단결력은 한국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상대팀보다 경기력이 떨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팀으로서 뭉쳤기 때문에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라바리니 감독이 태블릿 PC를 통해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라바리니 감독이 태블릿 PC를 통해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배구협회는 계약이 만료된 라바리니 감독에게 재계약을 제안했다. 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행을 고민하게 했던, 어머니의 건강은 좋아진 편이라고 한다. 연봉(10만 달러·추정) 인상 가능성도 있다.

코로나19 팬더믹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클럽 팀과 병행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지난 시즌 노바라를 유럽배구연맹 챔피언스리그 3위에 올려놓은 라바리니 감독은 올해도 팀을 이끈다. 12월에 열리는 세계클럽선수권에도 출전할 것으로 보인다.

라바리니 감독은 한국 배구 대표팀 재계약에 대한 질문엔 "고맙게 생각한다. 우리가 열심히 해왔다는걸 인정해준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마지막으로 지난 2년간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그는 "나 개인적으로도, 일적으로도 훌륭한 경험이었다. 존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 여정을 걸을 수 있어 감사하다. 한국 전체가 따뜻하게 응원해준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는 "멋진 팀과 함께 한국을 위해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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